현재 순자산은 고작 400여만 원. 펀드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게다가 투자금 전액은 주식이나 채권이 아닌 현금성 자산에 들어 있다. 주식형펀드는 원칙적으로 주식에 60%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설정 이후 꾸준히 주식 매매를 해왔지만 성과가 좋지 않았고 지난해 말 주가가 급락하자 남은 주식마저 모두 팔아버린 것.
정상적인 운용을 포기했는데도 이 펀드는 자산관리의 대가로
약 2.5%를 수수료로 꼬박꼬박 떼어 간다. 담당 펀드매니저는 취재팀이 운용 실태를 묻자 “1년 반 전 이 회사에 왔을 때부터
제대로 운용되지 않고 있었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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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오를 때 신상품 남발…주가 급락하자 대부분 방치
자통법 시행 후 비용 늘어…일부선 펀드 청산 움직임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규모가 형편없이 작고 운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자투리 펀드’가 크게 늘고 있다. 17일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순자산이 10억 원 미만으로 설정된 지 1년 이상 된 공모 펀드는 3월 말 현재 1393개(3246억 원)에 이른다. 금융위기 이전인 지난해 3월 말 860개(1872억 원)에 비해 60% 이상 급증한 규모다. 순자산이 1억 원 미만인 펀드가 230개나 되고 순자산이 1000원, 2000원인 ‘깡통 펀드’도 수두룩하다.
소형 펀드 투자자는 대형 펀드와 비슷한 운용보수를 내면서도 자산운용사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펀드가 일정 규모 이하가 되면 분산투자를 해야 하는 주식형펀드는 운용이 어렵다. 펀드의 순자산이 1억 원을 밑돌 경우 주가가 100만 원가량 되는 롯데제과 주식은 10주도 못 산다. 펀드 자산의 10% 이상을 한 종목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펀드매니저는 대형 펀드를 중심으로 수익률을 관리하기 때문에 자투리 펀드는 운용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펀드는 약 1만 개로 미국(약 7000개)보다 많다. 그러나 펀드당 순자산은 전 세계 평균(3억6000만 달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3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자투리 펀드의 양산은 금융감독 당국의 무능력과 자산운용사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일부 투자자들의 ‘묻지마’ 투자 관행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하지만 부작용의 대가는 고스란히 투자자들의 지갑에서 나가고 있다.
○ 펀드 대량 생산의 후유증
소규모 펀드가 무수히 난립하는 현실은 ‘펀드 광풍(狂風)’ 시대의 유산이다. 2005∼2007년 국내 증시가 대세 상승기로 접어들자 자산운용사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운용되는 펀드를 겉포장만 바꾼 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이 중 수많은 펀드가 최근 금융위기와 증시 급락의 역풍을 맞고 ‘꼬마 펀드’로 전락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운용사들이 단기간에 수익을 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신상품을 쏟아낸 탓이 컸다. 한 펀드를 오랫동안 키워서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비슷한 펀드를 대량 생산해 내놓는 것이 장사가 더 됐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의 피해가 늘어나는데도 운용사와 판매사는 소규모 펀드를 해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수료를 꾸준히 받을 수 있는 자투리 펀드를 굳이 청산해 소비자, 판매사와 분쟁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월 초 자본시장법이 시행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자본시장법은 적게는 3억∼4억 원에서 많게는 연간 100억 원에 이르는 펀드 운용보고서 발간 비용을 펀드 자산이 아니라 운용사가 직접 부담하도록 했다. 자산운용사로서는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자투리 펀드를 하루빨리 정리해야 할 처지가 된 것. 자산운용사의 한 관계자는 “1년 순이익이 수십억 원에 불과한 중소형 운용사들은 운용보고서 비용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라서 자투리 펀드 청산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 외국에선 펀드 범람 방지 제도화
증시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사태를 예상하고도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금융당국과 운용철학 및 미래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묻지마 투자’를 한 투자자들의 잘못도 크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선 펀드매니저 한 명이 관리할 수 있는 펀드 수를 제한하거나, 투자자 보호를 위해 소규모 펀드를 정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자본시장이 발달돼 있고 투자문화가 성숙한 나라에서는 소규모 펀드가 난립하지 못하도록 법적인 장치가 제도화돼 있다. 국내에서는 설정액 50억 원이 넘어야 개별 공모 펀드가 회계감사를 받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펀드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펀드가 감사를 받아야 한다. 운용사가 이런 부담 때문에 자투리 펀드를 만들기 어렵도록 금융당국이 투자자를 위해 미리 방어막을 쳐놓은 것이다. 대만에서는 투신사가 1년 동안 팔 수 있는 펀드 수가 제한돼 있다. 투자자를 유치해 일정 금액을 모으지 못하면 펀드 운용 허가도 나지 않기 때문에 대만의 투신사들은 한국처럼 펀드를 대량으로 만들어 팔 수 없다.
소규모 펀드의 양산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의 투자문화도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1999년 설립된 일본의 사와카미투신운용은 주식형 펀드인 ‘사와카미 펀드’ 하나만을 운용하고 있다. 설립 당시 개인투자자 487명이 모은 16억3000만 엔으로 시작해 현재 2400억 엔까지 규모가 커졌다. 이 펀드는 낮은 수수료(연간 1.05%)로 장기투자를 지향해 일본 샐러리맨들의 사랑을 받는 펀드로 자리 잡았다. 펀드 가입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엄연한 투자인데, 투자에 실패한 펀드를 청산한다고 투자자들이 몰려와 항의하는 모습은 투자 선진국에서는 보기 어렵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자산운용사와 판매사, 소비자 간의 이해가 엇갈려 자투리 펀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자투리 펀드의 수를 줄일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