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세계 금융시장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설이 나돌았고 이 약점을 틈타 국제 고리채업자들이 몰려왔다. 중동 산유국 왕자들을 업은 국내외 브로커들이 각종 경로를 통해 전달한 수억 달러의 제안이 청와대나 나에게 들어왔고 대통령도 관심이 있어 보였다. 청와대에서 만나보라는 권고가 있어 유럽경제협의체(ECOCK) 회의차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호텔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왕자와 밀회한 일이 있다. 그의 말인즉 정부나 중앙은행이 위임장을 써주면 자기가 단시일 내에 몇억 달러를 조달해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시 이런 제안을 받은 것을 합하면 80억 달러 정도는 됐을 것이다. 나는 그 왕자에게 한국은 국제적 사금융에 의존할 만큼 외환 상환이 어렵지 않으며 앞으로도 공적 금융기관 외에는 일체의 거래를 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왕자는 크게 실망했지만 나는 앞을 내다보고 한 말이었다.
만약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정부나 한국은행의 위임장을 써주면 커미션을 노리는 그들은 그 위임장을 갖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전주(錢主)를 구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외환 사정이 위급하다는 풍문이 돌아 한국의 신용도가 일시에 추락해 공적 금융의 길이 막히고 잘못하면 외환위기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95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금융 브로커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내 태도에 대해 정부 주변에서 나의 무(無)정견을 비판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정부 주변에서 외국 브로커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외국 신문들이 개발도상국, 특히 한국의 외환 사정에 대한 추측 기사를 쓰는 일이 계속됐다. 나는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신용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돼 하나의 대응책으로 잔꾀를 부리기로 했다. 즉, 외환 사정이 절박했음에도 불구하고 3000만 달러의 불량 채무를 조기 상환해 마치 외환에 여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악성 차관을 소개했던 유명한 국제금융브로커 E 씨(이름은 밝힐 수 없다)와의 거래를 금지한다고 재계에 통보했다. 이 말이 국제 금융시장에 퍼지자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과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이 건전하게 외환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국제수지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건설업의 중동 진출이었다. 우리의 용역수입은 1975년 4억500만 달러 수준에서 1976년 9억4400만 달러, 1977년 약 20억 달러, 그 후부터는 연간 30억 달러로 도약했는데 대부분이 중동에서 들어오는 공사대금이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중화학제품의 수출 증가와 중동에서 들어온 수입으로 1977년 국제경상수지가 약간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다음 해인 1978년 12월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유가는 2배나 폭등해 국제수지는 다시 적자 기조로 환원되고 말았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