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여백]이태용 아주그룹 부회장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1분


《단정하게 차려입은 흰 옷이 행여나 흐트러졌을까봐 한 번 더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바닥에 그어진 선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왼손이 천천히 올라온다.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오른손으로 당기는 활시위가 더 팽팽해진다. 주변이 조용해 활이 휘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다. 더 당기면 활이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핑’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산 중턱의 조용한 공기를 가느다란 화살이 가로지른다. 잠시 후 ‘턱’ 소리가 한 번 더 공기를 흔든다. 국궁 입문 2년차인 아주그룹 이태용 부회장(63)이 쏜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다는 뜻이다. 최근 서울 중구 장충동 남산 중턱에 있는 국궁장(國弓場) ‘석호정’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이태용 부회장을 만났다. 》

‘휭~’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 짜릿한 해방감이 몰려온다

3년째 국궁에 푸욱 빠져

“골프보다 훨씬 더 재밌어요”

자기반성 강조 ‘집궁 8원칙’

경영현장서도 훌륭한 교훈

○ 남산을 걷다 국궁을 만나다

이 부회장은 학생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태권도와 정구에 빠졌다. 1972년 한국은행에 입사한 후부터는 테니스부터 골프까지 여러 가지 운동을 즐겼다. 많은 운동 중에서도 이 부회장이 특히 좋아한 운동이 바로 ‘남산 오르기’다. 다른 산보다 특히 도심 속에 위치한 남산을 즐겨 올랐다. 1976년 대우그룹에 입사하면서 이 부회장의 ‘남산 사랑’은 더욱 각별해졌다. 점심 먹고 소화시킬 겸 남산을 오르고 퇴근하면서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남산에 올랐다. 주말에도 시간만 나면 부인과 함께 남산을 거닐었다.

국궁과의 인연은 평소처럼 남산을 산책하던 ‘어느 날’ 우연히 석호정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보고 막연한 호감을 느껴 ‘나도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활을 좀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지난 2007년 다시 같은 자리를 지나가다 결심을 굳히고 본격적으로 활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 보여요, 화살 날아가는 게. 그러다 익숙해지면 내가 쏜 살 날아가는 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게 과녁에 딱 맞는 순간은…. 골프공 잘 맞아서 날아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요. 해방감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국궁을 하면서 팔 힘이 세져 골프를 쳐도 30∼50야드를 더 멀리 날릴 수 있게 된 건 덤이다.

○ 화살 한 개로 무도(武道)와 예절(禮節) 모두 배운다

별다른 조준장치도 없는 국궁이지만 과녁과의 거리는 양궁(70m)보다 갑절 이상 먼 145m다. 이쯤 되면 맞히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낮춰 부를 때 ‘동이(東夷)’라고 불렀잖아요? 그 ‘이’ 자에 활 궁(弓)자가 들어가 있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활을 잘 쏘는 민족이었단 뜻이죠. 낮춰 부르면서도 그 활은 무서웠다는 거예요.”

우리 선조들이 침략을 막기 위해 손에 들었던 ‘무기’인 국궁은 지금은 무(武)와 예(禮)를 함께 배우는 정신을 가지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이 부회장의 설명이다.

“5발을 쏴서 모두 과녁에 맞히는 ‘통과 의례’만 거치면 그 다음부터 여러 사람이 활을 쏠 때는 입문 연차에 관계없이 무조건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쏩니다. 내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어르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죠.”

활을 당기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사대(射臺·활을 쏘는 사람이 서는 위치)에 선 사람은 모두 입을 일절 열지 않아야 한다. 활을 쏘는 사람이 최대한 과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것이다.

“어르신을 공경하는 분위기가 많이 흐려지고 능력이나 실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이유로 힘없이 밀려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요즘이잖아요. 이런 세태에 국궁의 이런 예절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 선찰지형, 후관풍세, 전추태산…

그룹에서 이 부회장의 주된 역할은 해외사업이다. 수시로 출장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경영 최일선에 선 그에게 국궁은 경영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고 이 부회장은 전했다.

“국궁 이론 중에 ‘집궁 8원칙’이라는 게 있어요. 그 정신이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집궁 8원칙(執弓 八原則). 활을 쏘는 사람들이 마음에 새기고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궁술 훈련의 기본 정신이다. 주변의 지형을 관찰하는 ‘선찰지형(先察地形)’,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살피는 ‘후관풍세(後觀風勢)’, 발의 위치를 정(丁)자도 팔(八)자도 아닌 상태로 서게 하는 ‘비정비팔(非丁非八)’, 가슴은 비우고 배에 힘을 주는 ‘흉허복실(胸虛腹實)’, 활을 쥔 손은 태산을 밀 듯 앞으로 민다는 ‘전추태산(前推泰山)’, 시위를 잡은 손은 호랑이 꼬리를 당기듯 뒤로 잡아당긴다는 ‘후악호미(後握虎尾)’, 쏘아서 활이 맞지 않을 경우를 의미하는 ‘발이부중(發而不中)’, 그렇다면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라는 ‘반구제기(反求諸己)’를 뜻한다.

“선찰지형은 먼저 우리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잘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바람을 읽는다는 후관풍세는 현재 위치나 상황뿐만 아니라 국제경기 등 다른 상황도 잘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죠.”

비정비팔과 흉허복실은 내가 지금 회사의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는 판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또 활을 쏠 때의 자세인 전추태산과 후악호미는 목표를 정했으면 전력을 다해 활시위를 당기듯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활을 쏜 후 자세인 발이부중과 반구제기는 일이 잘 안 됐을 경우, 목표에 다다르지 못했을 경우도 남이 아닌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가르침을 준다고 한다.

이 회장의 ‘국궁 경영 철학’은 화살 하나에도 담겨 있다. 당길 때 온 마음과 몸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을 갖지만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과 과녁에 맞는 위치를 보면 활을 당길 때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는 것. 이런 ‘반성의 자세’가 경영 일선에서 큰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전심전력을 다하게 자신을 다잡아 주는 훌륭한 ‘교훈’이 된다는 이야기다.

최근 해외출장 일정이 줄줄이 잡히는 바람에 이 부회장이 이런 가르침을 몸으로 익힐 시간은 크게 줄었다. 한 달에 한 번도 활시위를 당기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고. 운동을 좋아하는 이 부회장에게 한 달이라는 공백은 너무 길지 않을까. 이 부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죠. 그렇게 또 절제의 미를 배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한국은행-대우 거쳐 해외사업 진두 지휘

○ 이태용 아주그룹 부회장은

보성고, 서울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한국은행에 들어갔다. 1976년 대우그룹에 입사한 이후 차근차근 승진해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 2007년부터 같은 회사 고문 역할을 하다 지난해 5월 아주그룹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해외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모로코, 알제리, 베트남, 태국과의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직을 한 번씩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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