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2000억원 이상 현금 보유
알짜 택지 확보해 분양률 높이고 덩치보다 내실경영 힘써
빠른 의사결정-아웃소싱도 장점
요즘 건설업계는 말 그대로 살얼음판이다. 지난해 443개 건설사가 부도난 데 이어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까지 100개 건설사가 부도 처리됐다. 올해 금융권의 신용평가에서 C, D등급을 받아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나 퇴출 판정을 받은 건설사도 20여 개나 된다.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창업자들이 이끌던 주택 전문 건설업체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지는 이런 혹한기에도 자금 걱정 없이 높은 분양 계약률을 달성하며 사업을 진행하는 건설사가 있다. 바로 ‘베르디움’이라는 아파트 브랜드를 가진 중견 건설사 호반건설이다. ‘어음을 쓰지 않고 현금 결제만 하는 기업’ ‘항상 현금을 2000억 원 이상 보유한 기업’ ‘2000년 이후 분양한 25개 사업장 계약률이 99%인 기업’….
모두 호반건설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은 호반건설이 ‘작지만 단단한 건설회사’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 외환위기 때 정면 돌파로 승부수
지난해 호반건설의 시공능력평가액 순위는 77위다. 호반건설 호반베르디움 호반토건 호반리빙 등 건설계열 10개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9463억 원이며 호반건설이 지금까지 지은 아파트는 5만여 채다. 호반건설은 김상열 회장(49)이 1989년 광주에서 직원 2명을 데리고 설립한 회사로 2000년 이후 대전, 충남 천안, 경기 용인 등으로 사업지역을 확대했다.
호반건설이 지금 같은 기반을 다진 것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다. 당시 임대아파트 사업을 주로 하던 호반건설은 외환위기와 함께 시련에 부닥쳤다. 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은 건설사가 부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임대보증금 반환을 요구했고 은행권에서도 만기가 되지 않은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에서 사업을 하던 비슷한 규모의 건설사 10개 가운데 9개가 쓰러졌다. 호반건설도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됐다.
고심하던 김 회장은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임대보증금 반환을 요구하면 돌려줬다. 더불어 1997년부터 1999년 사이 임대아파트를 1만6000채나 지었다. 사업을 확대하자 일부 입주자들만 임대보증금을 받아갔을 뿐 큰 동요는 발생하지 않았다. 목 좋은 터에 임대아파트를 지은 덕에 타사보다 보증금을 높게 받을 수 있었고 임대도 무리 없이 진행돼 2000년에 현금 2000억 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광주지역 10개 중소건설사 중 유일하게 호반건설만 살아남은 것이다. 호반건설이 현금 결제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 현금 결제의 선순환 효과
9개 건설사가 모두 부도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김 회장은 ‘안정성’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뒀다. 김 회장은 “차입금이 아니라 내 돈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음을 막지 못하면 부도로 이어지는 만큼 부도 가능성을 아예 없앤다는 차원에서 어음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어음을 활용하면 투자 자금에 여유가 생기지만 그만큼의 기회는 포기하는 셈이다. 가령 한 달에 400억 원씩 6개월짜리 어음을 발행하면 2400억 원을 쓸 수 있다. 김 회장은 “이는 착시 효과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음을 발행해 확보한 2400억 원은 엄밀히 말하면 ‘빚’인데도 실제 자금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외부 자금을 많이 끌어와 사업을 하면 소문이나 작은 충격에도 회사가 금방 주저앉는다”고 말했다. 보유하고 있던 상업상호저축은행을 레버리지가 높다는 이유로 2000년에 매각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2000년부터 호반건설은 현금 2000억 원을 항상 확보하고 있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쓸 수 있는 1000억 원과 보유한 국채 600억 원 등을 합치면 곧바로 쓸 수 있는 가용자금은 3000억 원을 훌쩍 넘는다. 현금 결제를 하자 협력업체들은 호반건설과 거래하고 싶어 질 좋은 자재를 싸게 공급하기 위해 경쟁했다. 호반건설에 현관문, 계단 난간 등을 납품하는 영진산업개발 이영웅 대표는 “현금으로 결제해주니 별도 금융비용이 안 들어가고 돈을 못 받을까봐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며 “애착을 갖고 제품에 하자가 없는지 거듭 확인하고 품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전, 용인, 충북 청주 등에 지은 아파트의 입주자들은 감사패를 전달하며 품질에 대한 만족을 나타냈다.
○ 조기 경보 시스템 가동
호반건설이 보수적인 자금 운용만으로 성장했다고 판단하면 오산이다. 사업성이 높은 택지를 선점하는 노하우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나간 핵심 요소다. 호반건설은 좋은 택지를 확보하기 위해 다각적이고 과감한 전략을 사용한다.
택지개발지구에서 분양하는 알짜 땅을 사들이기 위해 호반건설, 호반베르디움 등 건설계열 10개 회사가 모두 입찰에 참여한다. 입찰 경쟁률이 100 대 1일 경우 1개 회사가 참여하면 당첨 확률은 100분의 1이지만, 10개 회사가 참여하면 확률이 10분의 1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미 확보한 택지라도 초기 분양률이 70%가 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면 예외 없이 매각한다. 이른바 조기 경보 시스템에 따라 전략적인 경영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다. 상당수 건설사가 초기 분양률이 40%만 넘으면 사업을 벌이는 것과는 구분된다. 알짜 택지를 확보하려는 호반건설의 노력은 집요할 정도다. 외환위기 때도 자금이 생길 때마다 대형건설사들이 내놓은 사업성 높은 택지를 사들였다. 지난해에도 자금난에 처한 한 건설사에서 청라지구의 목 좋은 터를 매입했다.
좋은 입지에 아파트를 지은 덕택에 2000년 이후 분양한 25개 사업장은 계약률이 99%에 이른다. 분양시장이 극심한 침체를 겪었던 지난해에도 인천 청라지구에 3036채를 분양해 100% 계약했다. 현재 분양을 진행하고 있는 용인, 광주 등 9개 사업지의 누적 분양률은 96%다. 진행하고 있는 분양사업의 평균 계약률이 90%를 넘지 않으면 신규 사업을 시작하지 않는 것도 원칙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새 사업을 벌이면 자금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민첩 경영(agile management)의 힘
호반건설의 전체 임직원은 250여 명으로 규모가 비슷한 다른 건설사의 3분의 1 수준이다. 상품개발실과 설계실도 없다. 현대 경영학이 지향하는 ‘민첩 경영’의 정신에 충실하려는 시도다. 즉 핵심 분야까지도 과감하게 아웃소싱해 고정비를 최대한 줄인 뒤, 몸집을 가볍게 만든 상태에서 환경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해나가는 전략을 추구한다.
호반건설 최종만 부사장은 “상품 개발과 설계는 그 분야 최고 업체에 아웃소싱하는 것이 좋은 품질을 확보하고 비용도 줄이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다른 건설사들은 전체 공사비용에서 본사 인력관리비로 4∼5%를 쓰지만, 호반건설은 0.5%만 쓰기 때문에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현금 결제로 협력업체들이 제품을 싸게 공급하는 것도 수익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최 부사장은 “호반건설은 시공 원가가 다른 건설사에 비해 3.3m²당 40만 원 이상 싸다”고 말했다. 덩치를 키우려고 수익성이 낮은 공사를 수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런 전략은 경영 환경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즉 비즈니스 사이클의 진폭이 큰 건설업종에서는 탁월한 측면이 있다. 대신증권 조윤호 연구원은 “건설사가 경기에 관계없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하려면 유동성을 확보하고 분양 가능성을 정확히 평가한 뒤 사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며 “원가를 줄여 수익성을 높이는 한편 당장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어도 경기가 나빠지면 회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저수익성 사업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는 것도 호반건설의 강점이다. 증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상장(上場)할 계획도 없다. 김 회장은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사업 이외 활동으로는 장학재단인 ‘꿈을현실로장학회’(기본자산 190억 원)를 운영하고, 올해 3월 여자프로골프단을 창단한 정도다.
호반건설에도 과제는 있다.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 ‘베르디움’ 브랜드를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간 10억∼15억 원이던 광고 예산을 올해는 100억 원으로 대폭 늘렸다. 앞으로 판교, 광교, 청라 등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 주요 지역에 분양하는 물량이 많아 브랜드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다. 분양시장이 더 침체될 것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다. 김 회장은 “우리의 맨파워나 실력으로는 지금의 규모를 유지하는 게 맞다. 대우건설, 현대건설 같은 종합대형건설사와 경쟁하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안다. 앞으로도 이 규모를 계속 유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민첩 경영 전략을 지켜 나가겠다는 뜻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