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브라운 스타일’

  • 입력 2009년 4월 25일 02시 54분


독일 브라운이 만든 전기면도기. 브라운은 현대 디자인의 뿌리인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을 기업경영에 그대로 적용해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지금도 존경받는 세계적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아예 브라운의 임원으로 기업경영에 참여했다. 사진 제공 브라운
독일 브라운이 만든 전기면도기. 브라운은 현대 디자인의 뿌리인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을 기업경영에 그대로 적용해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지금도 존경받는 세계적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아예 브라운의 임원으로 기업경영에 참여했다. 사진 제공 브라운
단순함 속의 정밀한 공간 배치

아이팟으로 이어진 ‘브라운 스타일’

많은 사람이 디자인의 힘을 논하지만 그 힘을 정량화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고객 앞에서 실적을 말해야 할 때에는 좀 모호한 과장법을 쓴다. 예컨대 “A사가 자신들과 만나 ‘ㄱ’이라는 신상품을 내놓았고, 매출이 기록적으로 높았다”는 식이다. 구체적인 수치나 판매에 영향을 미쳤던 다른 요인을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따져 묻는 고객도 많지 않다. 이유야 어쨌건 매출 증가는 사실이고 잘만 하면 자신들도 그 운명에 편승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사실 판매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하나둘인가? 성공 스토리의 이면에는 기업들의 디자인 판촉 유통 가격 홍보 등 전방위에 걸친 각별한 노력이 있게 마련이다. 디자인 성공사례를 논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가운데서도 디자인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는 것이 독일의 가전 메이커 브라운이다. 192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막스 브라운이 설립한 브라운은 1967년 질레트에 인수된 뒤 2005년에 다시 P&G에 흡수 합병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디자인 명가’라는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1951년 막스 브라운이 사망하자 30대의 두 아들이 경영을 승계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이 근근이 경영을 이어가던 중 1954년 혁신의 기회를 맞았다. 울름조형대학 설립자 중 하나인 막스 빌 등 바우하우스 출신 디자이너들과 만나게 된 것.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라는 독일 건축가가 세운 조형예술학교로 디자인과 산업디자인의 만남을 최초로 진지하게 고민한 현대디자인의 출발지와 같은 곳이다. 이곳의 디자인은 감각주의를 배격하고 ‘최소한의 디자인’을 최상으로 생각했다. 브라운의 경영자들은 단순한 가전메이커를 넘어서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기업이념으로 삼기로 하고 그해 새 디자인 책임자로 울름조형대학의 프리츠 아이힐러를 고용했다. 1955년에는 오늘날 전설적인 산업디자이너로 꼽히는 디터 람스가 합류했다.

이후 ‘브라운 시스템’이 속속 선보인다. 그리드 시스템(눈에 보이지 않는 격자눈금을 통해 레이아웃을 정리하는 시스템. 편집디자인에서 많이 사용)을 엄격하게 적용한 광고와 제품디자인을 통해 편안하고 정돈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런 일은 디자이너 람스가 기업의 임원 위치에서 경영에 직접 참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무려 40여 년간 브라운 디자인을 이끌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브라운 전동 면도기나 칫솔 등 가전제품 디자인은 바로 디터 람스 스타일, 더 멀리는 바우하우스 스타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디터 람스 디자인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제품 디자인을 그래픽 디자인처럼 했다. 입체적인 제품의 형태를 가급적 기하학적으로 단순하게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방형의 표면에 그리드 시스템을 적용했다. 둘째는 알루미늄을 주된 마감재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알루미늄의 내구성과 심플한 색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당시로서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디터 람스 디자인은 오늘날에도 애플의 맥북 프로와 아이팟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에 소개한 바 있는 애플사의 조너선 아이브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가 바로 디터 람스다. 람스가 1964년 디자인한 멀티밴드 라디오 T1000을 보면 조너선 아이브가 디자인한 맥북 프로나 아이팟과 매우 닮았다. 람스의 디자인, 혹은 그의 디자인 이념이 그대로 애플에서 재현된 것이다. 두 회사는 기업 이념도 유사하다. 이쯤 되면 브라운이 가전제품 명가로 브랜드의 힘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로 디자인의 힘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1967년 브라운이 질레트에 합병될 때 제품디자인 부서만은 질레트가 브라운에 합병됐다고 한다.

브라운 디자인의 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디자인 혁신에 들어간 당시 젊은 경영자의 유연한 사고방식을 꼽고 싶다. 만약 완고한 선대 설립자가 계속 회사를 경영했더라면 과연 막스 빌 등을 만나 생뚱맞게 바우하우스 디자인 이념을 기업이념으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환경을 개선해 삶을 좀 더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편안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현대 마케팅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비자의 요구’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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