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28>경제개발의 길목에서

  • 입력 2009년 5월 2일 02시 57분


한국 건설사들은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중동에 적극 진출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건설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한국 건설사들은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중동에 적극 진출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건설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28>중동 진출

고급 건설기술 습득-오일달러 유입

중동진출 3년새 무역외 수입 5배로

사우디 정주영회장 창의력에 감탄도

1975년 12월 경제기획원은 ‘대(對)중동 진출 방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외화 가득액 극대화, 행정지원체계 정비와 창구 일원화, 건설 및 기술인력 진출의 내실화를 위한 방안이 건의됐다.

정부가 실시한 지원체계를 요약하면 관계부처와 현지 공관에 업무 전담반을 구성하고 국무총리와 관계장관으로 구성된 ‘중동경제협력위원회’를 설치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차관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경제협력실무위원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또 해외건설 사업소득 및 근로소득에 대해 소득세를 50% 감면하며 수주질서를 확립하고 과당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해외건설 촉진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취득한 외화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해외건설자금 운영요령’을 제정하고 관민(官民) 합동 경제외교를 강화하는 내용 등도 포함됐다.

한편 이 시기에는 중동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해 정부는 물론이고 학계나 민간단체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에게 건의해 1976년 1월 중동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초대 소장으로 정재석 씨(후일 경제부총리가 된다)를 임명하게 됐다. 그 후 1977년 이 연구소는 ‘국제경제연구원’으로 개편됐고 1982년에는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으로, 1984년에는 다시 ‘산업연구원’으로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와 건설업계의 긴밀한 협력으로 중동으로부터의 외화 수입이 급속히 증가했는데 그것은 국제수지표의 ‘무역 외 수입’란에 반영돼 있다. 당시의 국제수지 통계에 따르면 중동 진출 초기인 1975년의 무역 외 수입은 약 8억 달러에 불과했으나 1976년에는 16억 달러로 배가 됐고 1978년에는 44억 달러에 이르렀다.

중동 수입은 제2차 석유파동으로 크게 증가한 원유 수입대금의 약 30%를 상쇄해 국제수지 방어에 크게 기여하는 동시에 1970년대 후반기의 고도성장과 중화학공업 건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기업이 중동 진출을 통해 건설 및 관리의 고급 기술을 습득해 후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참고로 2007년 해외건설 수주실적은 398억 달러였고, 2008년에는 476억 달러에 달했다.

우리 기업은 해외 건설에서도 탁월한 경쟁력을 발휘했다. 1978년 대통령 특사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 때 주요 건설현장을 돌아본 일이 있다. 그때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은 주바일 방조제 공사 현장으로 나를 안내했는데 그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 대역사(大役事)를 국제 경쟁입찰에 부쳤고 다른 나라의 기업들은 13억 달러 내외의 가격을 써냈는데 현대는 9억3000만 달러를 써내 낙찰 받게 됐다는 것이었다.

정 회장에게 ‘그러고도 수지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현대는 울산조선소에서 공사에 필요한 모든 철재를 가공해 바지선(뗏목처럼 바닥만 있는 화물선)으로 운반해 오면 공사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어서 충분히 수지가 맞는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창의와 결단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비가 오지 않으리라 예상해 지붕공사를 소홀히 했다가 비가 와 낭패를 본 기업들도 있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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