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조 회사채 발행직전 시장 악화
돈줄 죄는 해외 IB들 설득 극적 성사
KTF 합병 앞두고 실탄확보 1등공신
거래처에선 ‘신뢰 교과서’로 통해
지난해 3월 17일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 인천을 출발해 홍콩에 착륙한 비행기에서 차재연 KT 자금담당 부장이 내렸다.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한 짧은 출장이었다. 차 부장은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휴대전화부터 켰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탄 지 3시간 30분 만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려고….’ 하지만 예상과 달리 휴대전화에는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불길했다. 이때 투자은행에서 다급하게 보내온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추가 여신 전면 중지.’ 차 부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100억 원을 번 국제전화 통화
그날은 KT가 외국계 은행들로부터 1억6000만 달러어치의 달러 표시 채권 발행에 관한 확약서를 받기로 한 날이었다. 발행 금리는 연 3.72%(3년 만기). 국고채 금리 5.17%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일을 잘 해결했다 싶었는데 갑자기 터진 미국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유동성 위기로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거의 모든 투자은행이 갑자기 돈주머니 끈을 조였다. 순식간에 국내 투자시장에서 달러가 증발했다. KT는 3월 31일까지 채권 발행을 성사시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공항을 나와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차 부장은 계속 전화를 했다.
“아직 유동성이 남아 있는데 너무 조이는 것 아닙니까.”
“미안합니다.”
“잠깐의 이익 때문에 KT처럼 신뢰할 수 있는 상대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 아시죠?”
“알겠어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차 부장은 “호텔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전화를 수십 통 한 것 같다”며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윈윈(win-win)이 될 것이라고 열심히 설득했다”고 전했다. 설득이 통했는지 KT는 예정된 채권 발행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금융시장이 요동치며 금리는 10일(영업일 기준) 만에 1.52%포인트가 올랐다. 채권 발행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면 4년간 100억 원 정도를 손해 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채권 발행 이사회를 다시 거치려면 회사 경영에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입니다. 엄청나게 구르지만 보람도 있죠.”
그는 이런 수완을 발휘하며 지난해 1조 원에 달하는 회사채를 최적의 조건으로 발행해 KT에 연간 900억여 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안겼다. KT가 KTF와의 합병을 앞두고 평소보다 2000억∼3000억 원 많은 1조 원의 채권을 성공적으로 발행한 데는 그의 공로가 컸다. 그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올 2월 상무로 승진했다. 4만 명에 가까운 KT그룹 내에서 여성으로서는 다섯 번째다.
○ “기업의 피를 통하게 하는 일 보람돼”
강한 협상력과 적극적인 추진력,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차 상무에게 주변에서는 ‘차다르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아래 직원을 휘어잡고 이끌어 가는 리더십이 대단하다는 평이다. 아래 직원뿐 아니라 투자은행 관계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차 상무는 “신뢰를 저버리거나 말을 바꾸는 상대와는 절대로 거래하지 않는 등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확실히 하고 있다”며 “시장에 그런 평판이 많이 쌓이다 보니 신뢰가 실제로 작동하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투자자들과 회사의 상생(相生)을 추구한다. “갑(甲)과 을(乙)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해요. 경기 상황에 따라 입지가 바뀌곤 하지만 그렇게 힘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은 아주 잠깐에 그치거든요. KT도 이익을 봤지만 투자자들도 장기적으로 재무구조가 건실해졌다는 점에서 이익을 봤다고 봅니다.”
차 상무는 무엇보다 팀워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뽑을 때부터 능력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를 체크한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아야 시간을 다투는 자금 관련 일을 하면서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자금 담당은 사람으로 치면 피를 통하게 하는 일입니다. 한순간에 자금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보면 돈이 참 무섭다는 것을 느낍니다. 돈은 항상 있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존재거든요. 돈의 순환을 관리하는 것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이지만 회사의 체질을 강화하는 중요한 일이어서 보람이 큽니다.”
차 상무는 재무관리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91년 KT에 입사했다. 그 뒤 KT경영연구소, 최고경영자(CEO) 보좌팀, 원가(原價) 담당 등으로 자리는 바뀌었지만 업무내용은 전문 분야인 재무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우물만 꾸준히 판 셈이다. 회사 내에서 경제적 부가가치(EVA) 개념을 한국과 KT의 현실에 적용한 교육서적을 집필하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잘나가는 차 상무이지만 초등학교 2, 3학년인 아이들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그래서 매일 저녁엔 자신이, 아침엔 남편이 직접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학원에 보내는 대신 직접 가르치는 이유는 “아이들과의 교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차재연 상무 프로필
-1991년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1991년 KT 경영연구소 연구원
-1999년 KT CEO 보좌팀
-2002년 KT 원가담당
-2003년 KT 가치경영실 자금담당
-2009년 KT 상무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