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기업이미지 통합(CI)의 선구적 작품으로 꼽히는 IBM의 로고마크는 1956년 디자니너 폴 랜드가 만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급성장한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체제로 들어가기 위해 숨고르기를 하던 때였다. 많은 기업들이 제품과 브랜드 디자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IBM은 랜드가 로고마크 등 브랜드 디자인을, 기업 디자인의 개척자로 불리는 엘리엇 노이에스가 제품 디자인을 맡는 쌍두 체제였다. 하지만 점차 랜드가 입안한 브랜드 디자인 계획이 제품 디자인의 큰 방향마저 결정하게 된다. 브랜드 이미지가 구체화되면서 제품도 그 틀 안에서 움직이게 된 것이다.
랜드는 두 가지에 역점을 뒀다. 하나는 로고마크의 시인성(視認性)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고마크의 사용법을 체계적으로 매뉴얼화하는 것이었다. 랜드는 로고마크가 알아보기 쉬워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시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환경의 시각적 혼잡도도 매우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성조기에서 보이는 가로 형태의 줄무늬였다. 인간의 시선은 생래적인 흐름을 갖고 있는데 가로방향은 이와 잘 들어맞는다. 그는 표준보다 가로가 넓은 평체의 알파벳을 가로로 써 로고마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IBM마크는 다른 기업들의 그림마크에 비해 시인성이나 가독성이 월등했다.
지금은 로고마크의 시인성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많이 밝혀져 당시의 판단이 좀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랜드의 기본에 충실한 태도를 존경한다. 요즘도 시인성과 같은 객관적 지표를 논하면 ‘그런 건 보기 나름 아니냐’며 모호한 의미나 세련미만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를 흔히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기업은 자사의 로고마크가 소비자의 기억 창고 맨 앞에 놓여 있어 문만 열면 바로 보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쉽게 말해 인지도가 높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쉽게 눈에 띄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시인성이 좋으면 브랜드 노출 빈도의 낭비도 줄어든다. 그 다음은 기억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마크와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 다른 기준들도 있지만 다음에 이야기하자.
이 기준에 비춰볼 때 IBM의 로고마크는 매우 우수하다. 눈에 잘 띄고 읽기 쉽게 배열된 글자여서 기억하기도 쉽다. 타이프라이터 등 당시 IBM이 생산하던 제품과 어울리는 서체인 점도 좋다. 랜드가 이런 중요한 요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랜드는 이렇게 만든 로고마크를 광고, 각종 서식, 명함, 간판 등 모든 대상에 통일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사용법을 매뉴얼화했다. 지금도 IBM에서 디자이너들이 모범으로 삼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전형을 제시했다. 이 덕에 IBM 직원들은 쉽게 브랜드 이미지를 이해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로고마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노이에스가 담당하던 제품디자인의 큰 방향까지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매뉴얼 덕택이다.
CI 매뉴얼은 제품 사용 매뉴얼과는 성격이 다르다. 단순히 완성된 로고마크의 작도법이나 색도를 표준화하고 광고나 간판 등의 사례를 담은 기념품이 아닌 것이다. CI 매뉴얼은 추상적 기업이념과 브랜드 이미지가 현실과의 접점에서 구체화되는 몇 가지 사례를 담고 이를 통해 역으로 기업이념과 브랜드 이미지를 기업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하는 수단이다. 사내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구성원이 매뉴얼의 내용을 숙지하고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기업에서 디자인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애로를 겪고 있다. CI 매뉴얼은 디자인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언어가 되고 구성원들의 디자인 교육을 위한 교재도 될 수 있다. 흔히 CI 제작에는 많은 돈이 드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이 매뉴얼을 호화롭게 꾸미는 데 들어간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외견이야 기업의 품위를 유지할 정도면 되고 실제는 그 속에 들어갈 내용과 체계를 연구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 CI 디자인은 매뉴얼에 담긴 내용을 구성원들이 이해하고 각자의 업무 영역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능동적으로 찾아나가는 과정의 출발점인 것이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