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CJ전략총괄부사장 겸 CJ경영연구소장은 1990년대 말 이후 세계 경제의 흐름을 ‘해장술 사이클’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버블의 생성, 붕괴가 반복되는 과정이 과음한 다음 날 숙취를 줄이려고 다시 술을 마시는 양상과 비슷하다는 분석이다.
김 부사장뿐 아니라 많은 경제 전문가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각국의 유동성 확대 정책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버블을 낳을 것으로 예상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로 ‘녹색’이다.
우선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그린 뉴딜’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경제위기의 진원지로 지목돼 체면을 구긴 미국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그린 이코노미’를 새로운 화두로 선택한 것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인재를 보유한 미국이 가장 유리한 영역이라는 점도 반영된 판단이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통해 세계화의 불가피성을 설파했던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요즘 ‘코드 그린’이란 책에서 “미국이 녹색 경제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명박 정부 역시 지난해 하반기부터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의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다. ‘녹색’이 새로운 무역장벽이 되는 시대에 한국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녹색 기술력의 제고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과 유럽 각국도 앞 다퉈 녹색성장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피치 못할 세계적 추세인데도 국내에서 ‘그린 버블’에 대한 염려가 나오는 건 10년 전 정보기술(IT) 버블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막대한 정책자금은 검증되지 않은 많은 벤처기업에 흘러들어갔다. ‘정부 자금 못 챙기면 바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덕적 해이는 심했다. 사업 목적에 IT란 단어만 추가해 주가를 끌어올린 기업도 수두룩했다.
녹색산업은 IT보다도 난도가 높은 ‘고위험, 고수익 산업’으로 꼽힌다. 일신창업투자의 고정석 사장은 “녹색기술은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성공 가능성은 낮아 벤처캐피털도 좀처럼 투자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녹색 기업의 위험성을 평가해야 할 한국 금융회사들의 관련 역량도 초보 수준이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증시에 ‘녹색 테마’가 형성돼 개인의 주식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버블을 피할 수 없다면 부작용만은 최소화해야 한다. 정부는 정책자금이 겉포장만 녹색이거나 기술력이 검증되지 않은 기업에 흘러드는 걸 차단해야 한다. 은행 등 금융회사와 신용보증기관은 녹색 기술투자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거나 ‘인증제’ 등을 도입해 녹색기업의 기술력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안 그래도 경기 침체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중산층의 적금 깬 돈이 ‘녹색 사기꾼’에게 털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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