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삼성전자는 올 1분기(1∼3월) 150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는 ‘깜짝 실적’을 발표했다. 글로벌 경기침체라는 악재 속에서도 지난해 4분기의 영업적자를 한 분기 만에 뒤집는 대반전이었다. 그러나 실적발표 전날 63만 원에 육박했던 삼성전자의 주가는 오히려 하락해 11일 현재 56만 원대에 머물고 있다. 대우증권 이승우 연구원은 “막상 실적이 발표되자 차익실현 매물이 나온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환율 하락에 대한 우려가 더 짙게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금융시장의 가장 큰 화두는 환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달러 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은 한국 경제가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최근 들어 환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서 한국 기업의 수출 경쟁력과 증시 회복세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커지고 있다.
○ 사라져가는 환율효과
1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지난 주말보다 9.10원 떨어진 달러당 1237.90원으로 마감했다. 3거래일간 39.10원 급락하면서 지난해 10월 14일(1208.00원) 이후 거의 7개월 만에 최저치를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급격한 환율 하락이 기업들의 수출을 다시 위축시켜 가까스로 회복 조짐을 보이는 국내 경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은 이날 보고서에서 “고환율 효과가 줄어들면서 자동차나 정보기술(IT) 업종의 주가 상승탄력도 감소하고 있다”며 “2분기 실적시즌에서 기대치보다 낮은 실적이 발표되면 ‘V’자형으로 오르던 주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1분기 어닝시즌을 계기로 기업들의 실적 전망치를 줄줄이 높여 잡았던 증권사들도 요즘은 일부 수출기업에 대해 신중론으로 돌아서고 있다.
삼성증권이 최근 환율 민감도가 높은 90개 주요 상장사를 대상으로 환율 변화에 따른 2분기 실적 변동폭을 조사한 결과, 연평균 환율이 1300원에서 1200원으로 떨어지면 이들 기업의 2분기 영업이익이 25%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때 100엔당 1600원까지 치솟던 원-엔 환율이 1250원대까지 떨어지면서 수출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환율 하락은 최근 외국인의 매수세에 탄력을 받고 있는 증시 수급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외국인은 지난달부터 11일까지 6조 원가량의 주식을 순매수했지만 현재의 환율 하락이 지나친 것으로 인식되면 언제든지 주식을 팔고 나갈 수 있다. 갖고 있는 주식의 달러 환산 가치가 쪼그라들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 “추가 하락땐 실물경제 타격 받을 듯”
한국은 이미 2006∼2008년 초에 걸쳐 세 자릿수 환율을 경험했다. 지난해 초 경상수지 적자를 우려한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쓰면서 환율을 1000원 이상으로 올려놓기도 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다. 따라서 지금의 환율 수준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실제로 환율이 900원대 초반까지 내려간 2007년에도 LG전자나 현대자동차는 1조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냈다. NH투자증권은 11일 보고서에서 “현재의 1200원대 환율은 그동안 과도하게 오른 것이 정상화된 것으로 적정수준이라고 본다”며 “부정적 파급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당시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의견이 더 많다. 기업들의 올 1분기 실적도 그나마 고환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4분기보다 개선된 것일 뿐 절대 수준을 놓고 보면 여전히 1년 전에 비해 훨씬 나쁜 상황이다.
증권가에서는 한국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원-달러 환율의 1차 지지선으로 달러당 1200원을 꼽고 있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터지자 환율은 같은 달 30일 1200원 선을 돌파하면서 급등세에 시동을 걸었다. 이승우 연구원은 “환율이 더 떨어져야 실물경제가 본격적인 타격을 받겠지만 일단 1200원 선이 붕괴되면 투자자들에게 심리적인 충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