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때문에 한국의 달러 표시 국내총생산(GDP)도 시시포스의 운명에 처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한국의 1인당 GDP가 2007년 2만1000달러에서 1만5000달러 밑으로 곤두박질할 것이라 전망했다. 그리고 이런 추세라면 2013년에 가서야 다시 2만 달러를 회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IMF의 예측대로라면 한국은 10년 가까이 1만 달러 벽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자칫하면 영원히 개발도상국 딱지를 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율 때문에 벌어지는 착시현상이다. 국민소득에 영향을 주는 원화표시 GDP는 지난 10년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올해에는 마이너스로 돌아서겠지만 환율이 떨어지면 달러 표시 국민소득은 1만7000∼1만8000달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내년에 경기회복이 본격화되고 환율이 1000원대로 안정되면 2만 달러 회복도 가능하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환율변동에 지나치게 노출돼 있어 환율이 국민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크다는 데에 있다. 10여 년 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국민은 누구나 원화 가치 폭락의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다. 불과 4개월 사이에 달러화 대비 원화의 환율이 900원에서 2000원까지 치솟은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환율이 주는 공포를 절대 잊을 수 없다.
사실 한국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피해가 적은 나라인데도 환율 때문에 가장 극적인 금융위기를 겪었다. 환율이 지난해 초 달러당 930원에서 10월 1500원을 돌파했고 다시 올해 3월에 1600원 선까지 오르는 난리를 치르면서 국민은 주가가 반 토막 난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었다. 물론 고(高)환율 덕분에 수출이 살아나고 선진국에 비해서 경기회복이 빨리 진행되는 일종의 ‘위자료’를 받고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환율의 널뛰기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환율이 너무 빨리 떨어져 수출업체에 어려움이 생긴다고 하지만 수출이 어려울 때마다 고환율의 유혹에 빠지면 기업의 체력과 경쟁력 개선은 머나먼 얘기다.
증시 또한 마찬가지다. 한때 환율과 주가가 역전된다는 예언이 적중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투자자들이 환율의 눈치를 살피면서 투자를 결정해야 한다면 기업의 장기 내재가치에 투자하는 올바른 투자문화가 정착될 수 없다. 적정한 환율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환율이 최소한 일정 범위 안에서 안정적으로 움직일 때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이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진다. 그래야 시시포스의 덫에서 해방된다.
이상진 신영자산운용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