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꿈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과 평생 배우겠다는 자세로 노력하다 보면 성공은 어느새 여러분 옆에 있을 겁니다.”
1일 서울 관악구 청룡동 서울여상 강당에 모인 학생 300여 명의 눈은 하나같이 연단 앞에 서 있는 선배의 입술에 고정돼 있었다.
연사는 이 학교 41회 졸업생 안경희 씨(56). 세계적인 금융회사인 JP모간의 중역을 지낸 안 씨는 이 학교 졸업 예정자였던 1976년에는 서울의 한 섬유회사 경리직원이었다.
“우리 부서에 남직원만 8명이었는데, 다들 퇴근 후에 무언가를 공부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나도 뭔가 더 배워야겠다’ 싶어 명지대 영문과(야간)에 입학했죠.”
주경야독의 고된 일상 속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던 안 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명지대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던 미국인 여교수와 단짝이 됐다. 이 교수의 권유로 그는 서울 용산 미8군 내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분교 경영학과(야간)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2년 뒤인 1978년 안 씨는 영자신문에서 JP모간이 한국 지점에서 일할 직원을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당초 부장급을 채용하려 했으나 면접장에서 “내가 못 해낼 일이 없다”고 말하는 안 씨의 배짱에 감동한 면접관은 과장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당시 안 씨의 나이는 25세.
“명함을 받던 날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해요. 명문여대를 나와도 비서로 일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과장인 거잖아요. 월급도 웬만한 한국 회사 사장보다 많았고요.”
안 씨의 더 큰 도전은 198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 뉴욕 JP모간 본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작됐다. 영어에 서툰 아시아 여성이 아이비리그 출신이 즐비한 월가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처절하게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남보다 2시간 일찍 나와 일하기 시작해 밤 12시가 지나야 퇴근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죠. 나에게는 성실이란 무기밖에 없었거든요.”
그의 노력은 초고속 승진으로 보답받았다. 입사 당시 1만5000명에 이르는 임직원 중 몇 안 되는 아시아인이었던 그는 입사 3년 만에 15개국 해외지점의 경리담당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1989년에는 신설된 ‘기업 위험 관리’ 부문의 북미지역 총책임자로, 2년 뒤에는 회사를 통틀어 150명밖에 없는 전무(Managing Director)로 승진했다. 이 회사 역사상 한인이 이 직위에 오른 것은 안 씨가 최초다.
2002년 은퇴 뒤 뉴저지 주의 패스칵밸리 병원에서 무급 이사로 재직하던 안 씨는 미국 거주 한인을 위한 의료프로그램(KMP)을 개발해 부사장으로 발탁됐다. 한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입원 기간에 한국 음식과 방송, 신문 등을 접할 수 있어 교민사회의 호응이 높다. 2007년부터 안 씨가 관리이사로 재직 중인 뉴저지 주 홀리네임 병원에서도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연간 이용객이 2만 명이 넘는다.
“영어가 서툴러 미국 병원을 이용하길 꺼리는 한인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 주목해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병원에선 한국인 임신부가 아기를 낳으면 미역국도 먹을 수 있지요.”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2003년부터 뉴저지 주 노던밸리 지역 7개 고교를 관할하는 교육위원에 선출돼 6년째 봉사하고 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가 ‘Excellent’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그 분야에서 탁월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얘기죠.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고 있으니 머잖아 나를 뛰어넘는 후배가 나올 수 있겠죠?”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