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서 본 신문이 인생 바꿨죠”
《‘2001년 예비군훈련에서 그 녀석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랫동안 홍상연 씨(39)의 가슴은 친구를 향한 배신감과 분노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화가 잔뜩 난 듯한 굳은 표정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슬금슬금 홍 씨를 피했다. 그는 예비군훈련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에게 7000만 원을 사기당했다. 책임지고 돈을 몇 배로 불려준다는 말을 믿고 선뜻 돈을 내줬지만 얼마 후 친구는 잠적했다. 홍 씨는 9년간 해군에서 근무하며 모은 돈과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고스란히 날렸다. 카드회사의 카드란 카드는 모두 발급받아 돌려막기를 했지만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줄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하는 빚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는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때 나이 서른셋.》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고 공공화장실에서 세수하고 공원에서 잠을 자는 노숙인 생활을 하던 중 ‘큰 거 한 건’만 터뜨리면 빚도 갚고 여의도에 큰 집도 살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부동산 분양대행업계를 기웃거렸다. 홍 씨는 “건설사를 잡기 위해 10개월간 매일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전국 곳곳을 헤맸다”며 “돌이켜보니 결국 ‘건달’생활을 했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를 잡아준 사람은 부인 윤점숙 씨(40)다.
윤 씨와 살림을 차린 뒤에도 홍 씨의 방황은 계속됐다. 2004년 11월, 윤 씨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그에게 지쳐 집을 나왔다. 전화로 울면서 돌아올 것을 애원하는 그에게 마음이 흔들린 윤 씨는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윤 씨는 재회한 홍 씨 앞에서 “사람이 앞으로 잘살아보겠다는 희망 없이 어떻게 숨만 쉬고 살 수 있느냐”며 대성통곡했다. 그 말은 홍 씨의 심장 깊은 곳에 박혔다. 추석 때 돈이 없어 어머니에게 못 가는 그를 위해 7만 원을 쥐여주며 고기라도 사서 집에 갔다 오라고 할 정도로 마음이 고운 여자였다. 더는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홍 씨는 공고와 군대에서 익혔던 전기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2007년엔 모든 빚을 없애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파산 절차를 밟았다.
2009년 6월 9일. 홍 씨는 굳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서울 동작구 본동에 ‘은혜전기’라는 전업사를 차린 것이다. 당당하게 건넨 명함에는 ‘은혜전기 대표 홍상연’이라고 또렷이 적혀 있다. 동아일보와 보건복지가족부, 하나금융그룹이 펼치는 ‘2009 함께하는 희망 찾기1-탈출! 가계 부채’ 캠페인을 통해 창업을 하게 된 그는 ‘희망 찾기 가게 1호점’의 주인공이 됐다.
하나은행이 출연한 하나희망재단은 그의 재기 의지와 기술만을 믿고 무담보 무보증으로 1700만 원을 빌려줬다. 이 돈에 갖고 있던 900만 원을 더해 14.9m²(4.5평) 규모의 아담한 가게를 마련했고 손님이 부르면 단걸음에 달려가기 위해 중고차와 오토바이를 장만했다. 은혜전기에서 전등, 콘센트 같은 기본적인 전기 소품을 팔면서 각종 신·증축, 리모델링, 인테리어, 전기 및 조명공사 출장일을 다닐 계획이다. 가게 한편엔 부인 윤 씨가 운영 중인 인터넷 쇼핑몰 ‘폴로피플’(cafe.daum.net/ganjlbaby)에서 파는 아기 옷과 신발도 진열돼 있다.
홍 씨는 “미용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동아일보 기사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며 “부채클리닉에 이어 창업자금 지원까지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 주위에서 받은 사랑은 친구를 향한 분노도 녹였다. 이제 더는 과거에 사로잡혀 살지 않기로 했다. 분노와 증오, 헛된 욕심을 버리자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부는 내일을 꿈꾼다. 집안 벽에는 ‘2000, 5, 20’, ‘60, 5, 30000’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앞의 것은 홍 씨의 목표. ‘5년 안에 2000만 원을 20억 원으로 만들자’다. 뒤의 것은 부인 윤 씨의 목표로 ‘5년 안에 6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가고, 인터넷쇼핑몰의 회원 수를 3만 명으로 늘리자’란다.
이날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은혜전기를 찾은 하나희망재단 안우선 자문위원은 “홍 씨는 진솔하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며 “지금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재기에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포도재무설계 이성엽 상담위원은 “상담을 받은 사람이 다시 의욕을 갖고 일어서는 모습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며 “오히려 홍 씨에게 내가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 홍상연의 남은 인생에 빚이란 없습니다. 빌린 돈을 하루라도 빨리 갚아 과거의 나처럼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숨만 쉬며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 있는 인생에 대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