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일찌감치 디자인의 문화적 가치에 주목하고 세계의 우수한 디자인 작품을 모아왔다. 시니어 큐레이터인 이탈리아 출신 파올라 안토넬리 씨가 이 일을 주도한다. MOMA에 영구 소장된 디자인 작품은 가구처럼 공예적 성격이 강한 제품이나 비닐봉투로 만든 이스라엘의 방독면처럼 독창적인 아이디어 소품 등 인간과 문화, 환경의 조화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대량생산되는 소비재는 드문 편인데 이 중 예외가 일본 프라마이제로의 가습기다.
이 가습기는 커다란 도넛처럼 생겼다. 중앙의 파인 부분에서 수증기가 나온다. 발매 4년이 지났지만 매년 판매량이 늘어 지난해에는 5만 대를 팔았다. 세계적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 씨의 작품이다.
대부분의 가습기는 사각육면체 형태여서 제품 자체는 세련돼도 실내 공간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후카사와 씨는 무엇보다 가습기가 실내 공간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선이 많은 실내 공간과 어울리는 방법은 두 가지, 즉 ‘조화’ 아니면 ‘대비’다. 조화를 이루려면 실내 공간과 유사하게 직선과 직각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대비를 시키려면 곡선이나 원형을 주로 사용해 직선적 모서리들과 확연히 구별해줘야 한다. 후카사와 씨는 후자가 더 독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백옥으로 된 둥근 연적(硯滴)이었다. 도넛 형태는 많은 물을 저장하는 탱크 기능도 겸비할 수 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통미와 현대미를 통합해 MOMA에 영구 소장될 정도로 우리의 생활환경과 미의식에 변화를 준 가습기는 이렇게 태어났다.
가습기, 벽시계, 전기스탠드 등을 생산하는 종업원 20명에 불과한 프라마이제로가 이렇게 우수한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회사 히라노 도모히코(平野友彦) 사장은 본래 자기 회사가 디자인 가전메이커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다. 디자인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속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장을 후카사와 씨는 “디자인은 장식과 다르다. 눈만 만족시키는 것이 장식이요 패션이지만, 디자인은 색채 형태 기능 모두가 필연에 의해 나오고 결정되는 것”이라는 한마디로 설득했다.
후카사와 씨는 경영자들이 디자인경영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인을 예술로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과 중국에서 디자인을 ‘설계’라고 번역하듯이 디자이너는 제품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다만 디자이너의 설계는 테크놀로지와 소비자, 즉 기술과 생활의 접점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엔지니어의 설계와 다를 뿐이다. 후카사와 씨는 가습기 기획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했다.
일본 후지쓰디자인의 가토 기미타카(加藤公敬) 사장은 디자인경영에 실패하는 4가지 경우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 경영자가 디자이너에게 “멋있는 물건 만들어 줘” 하는 식으로 요구한다면 이는 디자인을 아직도 예술로 보고 있다는 말이 된다. 디자인은 기술, 기능, 편리성, 아름다움, 전통 문화와 새 문화를 융합하는 수단이되 예술과는 많이 다르다. 둘째, 상품기획회의에 마케팅 담당자만 참여하는 경우다. 디자이너는 자기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해당 사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큰 맥락을 이해하고 능동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셋째,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너무 의식한다면 기업에 해롭다. 디자이너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지 자기 개성이나 명성을 중시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카탈로그에 제품의 기능 설명만 꽉 차 있다면 이 또한 반(反)디자인적이다. 카탈로그나 매장에서 보이는 제품의 모습도 디자인의 일부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최근 국내 기업에서 확산되고 있는 디자인 아웃소싱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돼야 할 것 같다. 상품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외부 업체를 초기 제품기획 과정에 참석시키지 않거나 사업 전체에 대한 정보 제공을 주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극복하려면 의뢰 기업과 디자인 에이전트 간에 신뢰를 쌓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한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동반자’라는 인식이 그 신뢰의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한성대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