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슬픈 역사 간직한 연해주
시베리아 자원개발 교두보로 활용
조사연구-적극적 진출 모색해야
필자는 1990년 9월 소련의 한 학술단체가 주최하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일이 있다. 회의를 마치고,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모스크바에서 그곳 상공회의소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시베리아를 광막한 동토(凍土)로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시베리아는 러시아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알게 됐다. 1990년 자료에 따르면 이 지역은 러시아 전체 석탄 부존량의 91.4%, 석유 65%, 천연가스 67.3%, 수력발전 65.8% 그리고 산림자원의 70%가 있는 곳이다. 이 밖에도 구리, 니켈, 우라늄,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 다양한 광물자원을 갖고 있어 러시아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는 기후조건이 열악하고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SOC)의 미비, 노동력 부족 등 장애요인이 너무나 많아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하기엔 위험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과 중국은 경쟁적으로 이 지역 진출을 꾀하고 있고 그들이 성공하면 동북아시아 경제력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베리아 동단에는 연해주가 있다. 연해주는 한인의 140년간의 슬픈 역사가 담긴 현장이다. ‘윤나라의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라는 블로그에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한인이 이곳에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1863년이다. 조선말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1870년대에 8400명, 1923년에는 1만2000명이 이주했다는 러시아의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23만 명이 이주해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 시에 스탈린은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이 일본을 지원할지 모른다는 망상으로 17만 명의 한인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켰다.(동아일보가 2007년 1월 1일부터 게재한 ‘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년’ 시리즈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딛고 중앙아시아를 쌀농사 지대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 등이 독립하자 한인들은 또다시 쫓겨나서 연해주로 이주하게 됐다. 지금은 약 6만50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연해주는 원래 간도의 일부였고 간도는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영토였으나 926년 발해가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에 멸망하면서 영토를 잃게 됐다. 그후 930여 년이 지나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에 따라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1909년 9월 4일 청일 간도협약을 통해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 연해주를 제외한 간도 땅을 넘겨줬다. 이로 인해 조선과 청의 국경을 지금과 같은 두만강과 압록강 경계선으로 획정해 버린 것이다.
한민족이 피와 땀으로 살아낸 이 지역을 다시 볼 때가 왔다. 연해주의 면적은 남한의 0.75배이고 인구는 207만 명. 자원은 많고 토지는 비옥하다. 최근 러시아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2008년 연해주를 방문한 외국인은 총 6만8000여 명이며 전체 방문자 가운데 중국인이 74%, 한국인이 11.6%, 일본인이 7.2%라고 한다.
우리가 연해주로 진출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 지역의 천연가스, 농작물, 해양자원을 개발하고 시베리아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남북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통일이 되면 북한 동포들이 대거 남하할 것인데 남한에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지금부터 연해주를 개발해 좋은 생활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한반도 북부의 주민들은 그곳으로 이주하려 할 것이다. 한국선진화포럼은 최근 연해주 교포 및 국내 전문가들에게서 그곳 사정을 들어봤는데 한인 주민이 5000명이 넘으면 자치주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대한 본격적 조사연구와 정부의 정책 마련, 그리고 뜻있는 기업들의 적극적 진출을 기대한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