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속에서 경쟁 기업보다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 대한 놀라움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제너럴일렉트릭(GE), 모토로라, 일본의 소니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 주요 대기업들의 실적은 기대 이상이었다. 경쟁 기업을 따돌리거나 격차를 크게 좁혔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1∼3월)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점유율(수량 기준)이 전년 동기 대비 2.3%포인트 늘어났다. 반면에 1위인 노키아는 2.8%포인트 떨어졌다.
LG전자는 올 1분기 액정표시장치(LCD) TV 시장점유율(판매액 기준)을 전년 동기 대비 1.8%포인트 끌어올려 2위인 소니를 바짝 따라붙었다. 두 회사의 점유율 격차는 이 기간 8.0%포인트에서 5.4%포인트로 좁혀졌다.
현대·기아자동차의 올 1∼4월 미국 시장 점유율은 7.5%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9%포인트 뛰었다. 미국 자동차업체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진 틈을 탄 반사이익을 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일본 자동차업체나 유럽 자동차업체들의 시장점유율 상승폭을 다 합쳐도 현대·기아차에 미치지 못한다.
○ 한국 기업 선전의 원동력
한국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성과를 올린 데 대해 고환율(원화가치 하락)과 엔고(엔화가치 상승) 덕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한국형 기업 모델이 위기에 빛을 발하고 있다는 시각도 많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들은 일본 기업의 기술경영, 미국 기업의 강한 구조조정을 배워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기에선 벤치마킹 대상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 기업들의 성장을 이끄는 힘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외환위기를 거친 뒤 10여 년에 걸친 ‘포스트 IMF’ 시대에 한국 기업들이 쌓은 경쟁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김경준 딜로이트 부사장은 “미국 일본 기업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10년 전 위기를 거치며 얻은 교훈을 잘 내재화했다”며 “10년간 금융 리스크 관리, 국제화 노력을 기울인 것이 효과를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위기가 아닐 때도 강한 구조조정이 체질화됐다는 의미다.
멕시코 레이노사에 있는 LG전자의 LCD TV 공장은 2000년 미국 TV 업체인 제니스를 인수하며 넘겨받은 곳이다. 이후 10년 동안 이 공장에선 치열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1만2000여 명이던 직원이 4년 만에 2600여 명이 됐다. 공장 용지도 10분의 1이 됐다. 그런데도 생산량은 오히려 늘었다. 회사 직원들은 “LG를 보니 제니스가 왜 망했는지 알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도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와 달리 과감하고 전략적인 집중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세계 조선업은 1980, 90년대 중반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이때 ‘대규모 설비 확장’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선박 수명이 약 25년인 점을 감안하면 2000년 전후로 다시 호황이 올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도박에 가까웠던 ‘불황기 투자’는 적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발주량이 늘며 현대중공업은 날개를 달았다. 세계 조선 물량을 흡수했다. 2003년부터 수주량, 건조량, 수주잔량 등 모든 면에서 한국 조선업은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삼성그룹은 최근 경제위기 속에서도 미래의 먹을거리를 책임질 씨앗 사업을 키우기 위해 삼성LED,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등의 신규 법인을 잇달아 설립하고 있다. 친환경 조명기기인 발광다이오드(LED) 사업에 특화한 삼성LED는 삼성전기에서 한 사업부를 떼어낸 뒤 삼성전자가 지분 50%를 투자해 만들어졌다. 두 회사가 자신의 단기적인 이익만 생각했다면 이런 투자는 이뤄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일본 소니는 미국 CBS레코드, 컬럼비아영화사 등을 인수하며 전자제품과 콘텐츠를 묶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전자업체가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렇다 할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소니의 한 고위 관계자는 “각 기업의 이익에 몰두하는 근시안적 경영에 발목이 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 피에 흐르는 유연한 변신, 파격적 혁신의 DNA
해외 시장에서 저가 브랜드 취급을 받던 현대차는 22일 미국 시장조사기관 JD파워의 신차 품질 조사에서 일반 브랜드 부문 1위에 오를 정도로 인정받게 됐다. 현대차는 올 초부터 미국 시장에서 차를 구입한 고객이 실직하면 차를 반납 받고 구입비를 되돌려주는 마케팅을 벌였다. 이에 대해 최근 한국을 방한한 필립 코틀러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매우 창의적인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헤르만 지만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도 “제품을 개선하기보다 서비스를 개선하는 불황기의 전략을 잘 이행한 것”이라고 칭찬했다.
2007년 미국 시장에서 애플의 아이폰이 큰 인기를 끌 때 이에 대응하는 상품을 가장 먼저 내놓은 것도 한국 기업이었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LG전자의 휴대전화가 “애플 아이폰을 대체할 최고의 제품”이라고 칭찬했다. 반면 변화를 얕보고 자기 스타일을 고집했던 모토로라와 소니에릭손은 시장에서 밀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드러난 한국식 경영모델의 성공에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많다. 세계적인 인사(HR) 컨설팅 기업인 휴잇어소시엇츠의 김용성 상무는 “한국식 경영은 위기 돌파 능력이 강하다”면서도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효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형 기업경영 모델에 대한 섣부른 결론을 내려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산업부 특별취재팀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김유영 기자 acb@donga.com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