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읽기]디자인과 인문학이 만날때…

  • 입력 2009년 6월 27일 03시 00분


미국 가전업체인 월풀이 선보인 에스프레소 냉장고. 사진 제공 월풀
미국 가전업체인 월풀이 선보인 에스프레소 냉장고. 사진 제공 월풀
디자인과 인문학이 만날때 냉장고에선 커피가 흐른다

《디자인 컨설팅을 하다 보면 간혹 허탈해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심리 문화적 원형을 토대로 한 디자인 개발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일이 부쩍 늘었다. 기껏 찾은 디자인 대안들을 이미 외국 경쟁사에서 선점하고 있는 경우다. 필자가 느끼기에 확실히 우연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들도 필자와 유사한 방법론을 사용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여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필자는 모 전자회사의 냉장고 디자인 컨설팅을 위해 여러 연령대 주부들을 심층 면접했다. 심층 면접에서는 소비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진 욕구 혹은 문화적 원형을 찾기 위해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질문을 많이 한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주부들의 삶에서 쇼핑이 일반적 예상을 넘는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부들은 출산, 해외여행, 질병 등의 사유로 일상에서 한동안 벗어나 있다가 복귀했을 때 회귀를 절감하는 대표적인 순간으로 ‘쇼핑’을 많이 꼽았다.

그동안 해소하지 못했던 소비욕구를 쇼핑을 통해 발산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딱히 살 것이 없더라도 카트를 몰며 매장 복도를 따라 걷고 다른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답답할 때 아이(eye) 쇼핑을 한다고 답하는 주부도 많았다. 소비행위로만 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쇼핑에 있는 것이다.

쇼핑의 심리적,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필자는 다른 응답들과 비교해가며 분석을 시작했다. 그 결과 쇼핑은 일종의 세상과의 소통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쇼핑은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권력과 시간을 갖고 있는 증거’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쇼핑에는 관찰을 통해 세상과 소극적이지만 확실하게 소통을 하고 자신이 그만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행위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주부들은 쇼핑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세상이 여전함을 확인하며 자신이 세상과 같은 박자로 호흡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경향은 세상과의 소통에 특히 관심이 많은 전업주부, 그 가운데서도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50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필자는 냉장고와 같은 전자제품에 소통 기능을 추가할 수 있다면 소비자들의 심층에 있는 욕구를 건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몇 가지 대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유사한 아이디어들이 이미 지멘스와 월풀의 디자인에 반영돼 있었다. 월풀은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를 냉장고 문짝에 장착해 부엌에서 외부와 영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거나 주부들이 식탁에서 이웃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에스프레소 커피 메이커를 장착한 냉장고도 발매하고 있었다. 지멘스는 2년 전 무선주파수인식(RFID) 장치를 부착해 식품 이력을 추적할 수 있는 냉장고를 발매했다. 이들은 주부들의 마음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거다.

이런 일치가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디지털 기기의 수많은 기능 가운데 유독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기능을 채용한 제품이 많다는 점이다. 또 심층면접이 국내에서는 드물지만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소비자 욕구 파악을 위한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점도 이들 가전회사가 필자와 비슷한 경로를 걸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비슷한 방법론을 사용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오기 쉽다. 그렇다면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면 독특한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새로운 디자인 방법을 개발하기란 매우 어렵다. 세상에 나와 있는 디자인 개발법은 크게 보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디자인들은 그 이상으로 다양하다. 매사가 그렇듯 사용자 능력에 따라 디자인 방법은 명작을 만들기도 하고 범작을 내놓기도 한다. 심층 면접을 통한 디자인 개발법에서는 사용자의 인문학적 소양,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사용자의 능력을 결정하는 변수가 된다. 필자의 아이디어를 외국 기업에서 이미 선점한 것은 그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했는가와 별개로 그들이 더 빨랐고 필자의 인문학적 소양이 그들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기업 최고경영자(CEO)들 사이에 인문학 ‘열공’ 바람이 일고 있다고 한다. 필자와 같은 사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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