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은 잘만 사용하면 고급스럽고 다른 어떤 색과도 잘 어울려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다. 패션디자이너들이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검은색 사용이 금기시되는 상품도 있다. 담배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애연가들조차 인정하는 얘기다. 그래서 담배 패키지는 흰색이 압도적으로 많다. 조금이라도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반대로 담배를 검정으로 포장하면 자칫 죽음이나 질병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마치 검은색 장의차처럼.
그런 담배에 처음 검정 패키지 디자인이 등장한 것은 미국의 레이놀즈 담배였다고 한다. 필자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거의 30년 전 색채에 대한 연구로 작위까지 받은 페버 비렌 경(卿)의 ‘컬러(Color)’라는 책에서 읽은 얘기다. 레이놀즈사에서는 판촉활동의 일환으로 금기를 깨고 검정 패키지의 담배를 출시했다. 더불어 레이놀즈사에서 후원하는 카레이서의 자동차도 판촉 기간 검정으로 도장했다. 검정은 카레이싱에서도 금기시하는 색이었다. 이중 파격인 셈이다. 생각해 보라. 치명적 사고가 빈발하는 카레이싱에 검은색 차가 등장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길하다.
세간의 관심이 레이놀즈사에 몰렸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후 필자는 검정 담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일본에서 검정 담배가 출시되는 것을 몇 건 목격했다. 말버러의 블랙 멘솔과 세븐스타 블랙이었다. 두 브랜드 모두 다른 디자인은 그대로 두고 배경색만 검정으로 바꿨는데 특히 말버러의 론칭 캠페인이 강력했다. 자동판매기도 검정으로 직접 제작해 공급하고 ‘충격, 등장’이라는 광고 문구도 사용했다. 론칭 캠페인은 두 달 정도 지속됐다. 얼마나 성과를 거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사례가 서너 건 되는 것을 보면 최근 담배회사들 간 경쟁이 더욱 심해진 듯하다.
검은색 디자인은 식품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커피나 초콜릿에서조차 완전 블랙은 드물다. 식욕을 높여주는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콜라들이 검은색으로 디자인되지만 단맛도 덜하고 식욕을 억제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이해가 가는 대목이 있다.
예외적으로 검정을 사용하는 경우는 대개 디자인성을 높이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려 할 때다. 검정을 사용하면 ‘어른용’ ‘심플’ ‘단단하고 강함’ ‘권위적’ ‘중후함’과 같은 느낌을 주는 데 유리하다. 또 어떤 색과도 무난하게 어울리기 때문에 세련된 느낌을 주기도 쉽다. 단적으로 말해 검은색 사용은 패션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패션화 전략은 시장의 크기가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제품 고유의 속성에 패션의 성격을 추가해 시장의 크기를 확대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모든 사람이 치약을 쓰는 시장에서는 인구가 늘지 않는 이상 시장은 커질 수 없다. 이럴 때는 코팅 기능 같은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상품 속성에 변화를 주거나 고급스러운 포장의 프리미엄급 상품을 만들어 새 시장을 만든다. 이런 방법들은 일련의 순환주기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운 기능의 추가 다음에 패션화 단계로 이행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다시 치약으로 비유를 하면 치약에 색과 향을 추가하고 화장품 같은 작은 용기에 담아 여성들이 백 속에 넣고 다니게 한다면 패션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담배의 경우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전체적으로 보면 담배 시장은 줄어들고 있다. 뭔가 시장에 충격을 줘야 할 필요도 있고 패션화와 더불어 프리미엄급 고급담배로 활로를 찾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디자인에 큰 변화를 줘서는 안 된다. 담배와 같이 구매행동이 패턴화된 상품군에서 낯선 디자인은 판매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금기를 깨는 색채가 가장 효과적이다. 검정 담배 패키지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메이커 간 기술 수준이 비슷하고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포화상태에 이르는 상품은 늘어난다. 담배는 세계적 금연운동 탓에 그 시점이 빨리 오기는 했지만 많은 상품이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그런 때마다 검은색 디자인을 보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거나 디자인을 패션화하는 방법은 조금만 연구하면 검은색 말고도 많이 있다. 소비자들은 좀 더 다양한 방식의 고급화, 패션화를 기다리지 않을까 싶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