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경제성장률이 지난달 정부가 전망한 ―1.5%보다 크게 높은 0%까지 상승해도 18개 국내 은행들의 부실채권 규모는 외환위기 때의 2.2배인 75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금융당국이 국회에 보고한 사실이 확인됐다. 최근 일부 경제지표의 호전으로 경기 바닥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감이 퍼지고 있지만 금융위기의 여파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수치다.
5일 금융계와 국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4월 구조조정기금 설치를 위한 법 개정 과정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국내 은행권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대외비를 전제로 보고했다.
이번 테스트는 금융감독원이 작년 말 한국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18개 국내 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전체 은행의 총부실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정부 주도 스트레스 테스트의 종합판이다. 현재 금융당국은 이 테스트 결과를 토대로 금융시장 안정에 드는 비용을 계산하고 있다.
○ 정부 전망치 이상 성장해도 75조 원 부실
테스트 결과에 따르면 올해 성장률에 따른 은행권의 부실채권(3개월 이상 원리금이 연체된 대출) 규모는 △0%일 때 75조 원 △―2.1%일 때 100조 원 △―4.2%일 때 140조 원으로 나타났다.
성장률 0%라는 가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경제연구원, 모건스탠리, 씨티그룹 등 국내외 기관이 내놓은 예상을 모두 뛰어넘는 장밋빛 시나리오지만 이 경우에도 부실채권 규모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 말(33조6000억 원)보다 41조4000억 원 많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OECD 전망치보다 0.1%포인트 높은 ―2.1%의 성장률을 가정하면 부실채권 비율이 작년 말 현재 은행권 총여신(1288조 원)의 7.8% 수준으로 급등해 1998년 말(7.6%)과 비슷해진다. 최악의 시나리오인 성장률 ―4.2%일 때는 도저히 부실을 감당하기 힘든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런 결과에 대해 은행들은 ‘매우 충격적인 수치’라는 반응을 보였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말의 부실채권 규모가 33조6000억 원이고, 2.2%의 성장률을 보인 2008년 말의 부실채권이 14조7000억 원에 그친 점을 감안하면 너무 혹독한 평가라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감원이 제시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은행들이 자체 건전성을 분석할 때는 자기 은행에 유리하도록 부실 가능성을 낮게 본 반면 금감원이 전체 은행의 부실을 따질 때는 대출채권의 회수율을 엄격히 적용해 양쪽의 결과가 크게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부실채권 중 60∼70%가 실제 손실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테스트 결과 나온 부실채권 추정금액이 전부 은행의 손실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들이 유가증권 매각이익처럼 본업 이외의 분야에서 얻는 자금으로 부실채권의 상당 부분을 털어낼 수 있어 실제 은행에 남는 손실은 부실채권의 60∼70% 선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럴 경우 성장률이 0%와 ―2.1%일 때 은행이 실제 입는 손실은 40조∼70조 원 선에 그친다. 현재 정부가 마련한 △구조조정기금 40조 원 △자본확충펀드 20조 원 △금융안정기금 20조∼30조 원 △예금보험기금 4조9000억 원 등 84조9000억∼94조9000억 원의 지원자금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악의 시나리오인 성장률 ―4.2% 단계에선 부실채권 140조 원 중 100조 원에 이르는 금액이 은행권의 손실로 남을 수 있다. 이 경우 현재 준비하고 있는 공적자금과 준(準)공적자금만으로 금융 부실이 실물 경제로 번지는 것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 ‘장밋빛 전망’에 취해선 곤란
이번 테스트 결과는 구조조정이 본격화하지 않은 단계에서 시중 유동성을 빠른 속도로 회수하면 ‘돈맥경화’ 현상이 재연돼 금융 불안이 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초에 비해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이는 재정 조기집행과 환율 효과 등의 덕을 많이 본 측면이 있어 은행권 연쇄 부실이라는 불씨가 완전히 꺼졌다고 보기는 이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실제 일부 전문가들은 광공업 생산의 총량이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여전히 크게 부진한 데다 최근 경기 호전 기미가 보이는 것은 상반기에 조기 집행된 재정 투자의 효과가 적지 않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오히려 △기업 구조조정 본격 추진 △원-달러 환율 하락 △국제유가 상승 △영국 및 유럽 지역 은행의 부실 가능성 등으로 금융 부실규모가 커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