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왕릉옆 용적률 팔고 산다면

  • 입력 2009년 7월 13일 02시 59분


그때는 몰랐다. 내가 딛고 서 있던 곳이 이 정도의 가치를 지녔을 줄이야.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소풍 때마다 단골로 가야 했으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중학교까지 모두 세 번이나 간 곳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동구릉과 서오릉, 태릉 중에 ‘소풍 3관왕’이 있을 것이다. 석양과 석마에 올라타 장난을 치기가 예사였고 봉분을 밟고 오르내리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얼마 전 조선왕릉 40기가 한꺼번에 세계문화유산이 됐다는 뉴스에 퍼뜩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이랬다. 하지만 대수로울 것 없어 보였던 그 무덤들이 이제 중국의 진시황릉이나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 같은 위상으로 올라섰다. 있는지조차 모른 채로 지내왔던 그동안의 푸대접에 비하면 천지개벽 같은 역전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왕릉이 엄청난 지위상승을 했다고 해서 그동안의 처지가 단박에 달라질 리는 없다. 왕릉과 그 주변은 정체 또는 퇴보의 냄새가 짙은 공기에 감싸여 있고 물밀듯하는 개발압력 앞에 무력하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선릉은 고층빌딩 숲에 파묻혀 있어 어디에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다. 서울 성북구의 정릉은 이런저런 빌라들이 코앞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경기 남양주시의 홍릉과 유릉, 경기 화성시의 융릉과 건릉 주변은 아직 한적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층빌딩이나 공동주택에 포위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문화재보호법령은 왕릉 등 문화재 주변 500m 이내 구역의 개발을 제한하고 있다. 이 구역의 폭은 지방자치단체마다 조례로 다르게 정했다. 땅값이 비싼 곳일수록 폭이 좁다는 점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서울은 100m 이내로 좁아졌다. 현재 사유지에 있는 문화재보호구역은 662km²에 이른다. 이 중 필지 수 기준으로 45% 정도가 주거, 상업, 공업지역에 속해 있다. 문화재 주변에서 고층건물이나 아파트를 짓는 토지 소유자들의 시도를 차단하기가 힘들어지는 배경이다.

전통과 개발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문화재 주변에 땅이 있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손해를 봐야 한다면 제아무리 세계문화유산이라도 곱게 비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국토연구원이 제시하는 용적률 거래제에 관심을 둘 만하다. 문화재 주변지역의 남는 용적률을 개발이 한창인 곳에 파는 방법이다. 용적률을 넘기는 곳은 개발을 하지 못해 입는 손실을 보전받을 수 있다. 용적률을 사는 쪽은 건물을 더 높이 올릴 수 있어 이익을 얻는다.

이 방안을 실현하려면 넘어야 할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용적률 가치를 산정, 관리하는 기구가 있어야 하고 용도지역지구별로 허용하는 수준을 헐겁게 해둔 현행 국토계획법의 손질도 전제조건이다. 무엇보다 용적률의 가치가 지금보다 귀해져야 할 것이다. 국토연구원 손학기 책임연구원은 “용적률을 사와서 개발하는 필요성이 공유돼야 한다”고 말했다.

용적률 거래제 도입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용적률 거래제는 탄소배출권 거래제와 비슷하다. 녹색성장의 바람을 타고 탄소배출권 거래제가 곧 도입되니 용적률 거래제의 현실화 역시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진 경제부 차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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