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이모 씨(53·여)는 올 1월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1단지 36m²를 4억9000만 원에 샀다. 현재 아파트 가격은 7억 원대로 올라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 씨는 “앞으로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위험하다고 만류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인들 상당수가 설 연휴 전후로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채은희 개포주공중개사무소 사장은 “12월부터 대기 수요자 100여 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가 올해 1월 들어 한꺼번에 아파트를 사들이기 시작했다”며 “고점 대비 40%가량 빠진 당시가 아니면 강남 입성이 어렵다고 판단해 대출을 받아 강남 아파트를 산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쌀때 사두자” 금융위기후 선제적 아파트 매입 급증
‘폭락 후 바로 회복’ 10년 전 환란 학습효과도 한몫
한국인들이 주택을 구입하는 패턴이 바뀌고 있다. 경기가 좋아진 뒤에야 부동산 거래가 늘고 가격이 오르던 부동산시장이 이번 금융위기에서는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되기도 전에 가격이 뛰면서 경기흐름에 앞서는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 부동산시장이 주식시장처럼 경기를 미리 보여 주는 바로미터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 실물경제보다 먼저 움직인 부동산 가격
동아일보와 부동산114가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와 지난해 터진 미국발(發) 금융위기 직후의 부동산 가격 변동률을 분석한 결과 외환위기 직후에는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나서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반면 이번 금융위기에는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 서울 강남지역 등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먼저 상승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회복될 때 주식→실물경제→부동산의 순서로 살아나던 수순이 주식 및 부동산→실물경제 순으로 바뀐 것이다.
지난해 고점 대비 최고 50% 가까이 가격이 곤두박질쳤던 강남 3구 등 버블세븐 지역의 아파트 값이 반등하기 시작한 것은 올 1월. 버블세븐 아파트 값 변동률(전월 대비)은 지난해 12월 ―2.54%에서 올 1월 0.04%로 돌아섰고, 이후 계속 상승해 6월 1.19%까지 올랐다. 강남 3구의 아파트 실거래량(신고일 기준)은 지난해 12월 244채에서 올해 1월에는 1000채로 급증했다.
부동산시장이 꿈틀대기 시작한 1월은 경기상황을 예측하는 데 쓰이는 경기선행종합지수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돌아선 시점과 같았다. 현재의 경기상황을 보여주는 경기동행종합지수가 전월 대비 플러스로 반전한 것은 이보다 2개월 뒤인 3월이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경기선행종합지수가 1998년 4월 플러스로 돌아섰다. 당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부동산 가격 변동률은 이보다 5개월 뒤인 9월이 돼서야 마이너스에서 벗어났다. 버블세븐 부동산 변동률도 1998년 8월에 들어서야 0.97% 오르며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상승했다.
부동산114 김규정 부장은 “외환위기 당시에는 경기가 호전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던 반면 이번 금융위기 직후에는 경기 불확실성이 계속됐지만 투자를 먼저 결심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 외환위기 학습효과로 투자자 인식 변화
전문가들은 부동산시장이 경기 선행적인 성격으로 바뀐 데는 외환위기로 인한 학습효과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택가격은 여전히 고점 대비 20% 이상 떨어진 상태. 한국 부동산시장만 유독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것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부동산도 주식처럼 저점에 투자해야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인식이 많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 경기가 상승할 것으로 믿고 부동산 가격이 바닥에 이른 시점을 투자 적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부동산시장이 경기보다 앞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금융의 발달로 부동산이 금융상품화하고 있는 것도 원인이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부동산 펀드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통해 부동산시장에 참여하는 금융업체의 수와 투자금액이 크게 늘면서 부동산이 주식시장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김현아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강남 3구 아파트들은 대기 수요자가 많아 금융상품처럼 손쉽게 거래가 가능하다는 특성이 부각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가격 변동성이 커지면서 부동산도 점점 금융시장을 닮아가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