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별 ‘환상 궁합’
대학 은사께서 오랜만에 와인이나 마시자고 연락하셨다. 함께 만나기로 한 은사의 고교 동창 세 분 중 두 분과는 이미 안면이 있다.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이라 몇 차례 함께 와인을 마신 적이 있었다. 나머지 한 분의 성함은 생소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은 폭탄주 마니아라고 했다.
모임의 준비를 맡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식당을 정하고 와인 리스트를 짜는 것이었다. 모임 이틀 전 참석 예정자들에게 “양갈비가 특히 맛있는 프랑스 식당입니다. 저는 ‘라 그랑드 담(La Grande Dame) 1998년산을 갖고 가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호주 시라즈’, ‘프랑스 론의 시라’, ‘프랑스 부르고뉴의 포마르’로 답한 문자들이 차례로 도착했다. 양갈비 때문인지 다들 힘깨나 쓰는 레드 와인을 골랐던 것이다. 세 병 모두 가격대는 내가 가져가겠다고 한 샴페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 와인은 모두 메인 요리와 어울리기에, 와인 리스트의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근사한 식사를 위해서는 입맛을 돋워 줄 와인, 메인 요리와 함께 할 주인공급 와인, 식사의 여운을 달래 줄 피날레 와인이 골고루 필요하다. 전채, 메인, 디저트로 이어지는 식사 흐름에 와인도 맞춰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음식이니 이왕이면 프랑스 와인을 곁들이면 좋겠다는 이유를 앞세워 호주 시라즈를 조정 대상으로 결정했다. 그 대신 치즈와 함께 마시면 두루 괜찮을 레드 와인과 디저트 와인으로 부탁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초 호주 시라즈를 가져오겠다고 한 분에게 전후 상황을 설명드리니 흔쾌히 그러겠노라는 답을 주셨다.
와인 애호가들은 이렇게 종종 각자의 와인을 가져와 마시는 경우가 있다. 위의 경우와 달리 모임을 준비하는 사람이 별도로 없는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면 미리 참석자들끼리 와인에 대해 상의할 것을 권한다. 몇 사람에게만 연락해 봐도 가져가야 할 와인의 가격대와 타입을 가늠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자칫 모임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위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자신이 가져간 와인이 상대적으로 너무 저렴한 경우가 잦게 되면,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리 없다.
모임 전 약간의 수고는 그날의 모임을 더욱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와인이 나올 때마다 “이건 누가 가져왔냐”고 묻던 폭탄주 마니아 손님은 헤어질 시간이 되자 서둘러 계산대 앞에 갔다. 굳이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기브 앤드 테이크’의 균형을 맞추는 보편적 예의는 와인 쪽에서도 유효한 것 같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샴페인 중 하나. 제조사는 ‘뵈브 클리코’. 피노 누아르(64%)와 샤르도네(36%) 품종을 섞어 만들었다. ‘위대한 여인’이란 뜻의 이 와인의 이름은 27세에 남편을 여의고도 프랑스 샴페인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고(故) 뵈브 클리코 여사를 기리는 뜻에서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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