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에 밀려 대출 길 막혀
일감 늘어도 정규직 못쓰고
어쩔수 없이 비정규직 고용
자동차 엔진 부품업체인 A사는 중소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올해 초 계열사의 은행 대출이 막혔다. 정부 정책에 따라 주거래은행의 중소기업 의무대출 비율이 70%로 정해지면서 중소기업을 최우선으로 대출해 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 대출 담당자는 “규모가 있는 중견기업에까지 자금을 지원해 줄 여력이 없다”고 A사에 통보했다.
이 회사는 직원 360명, 매출액 2100억 원인 중견기업으로, 현행 중소기업기본법에 따르면 제조업체의 경우 상시 근로자가 300명을 넘거나 자본금이 80억 원을 넘으면 중소기업에서 제외된다. 결국 A사는 2000만 원을 들여 새로 담보를 설정한 뒤 거래 실적이 전혀 없던 다른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A사 대표는 “담보를 새로 설정할 자산이 없는 중견기업은 거래은행을 바꾸지 못해 자금난에 시달리기도 한다”며 “정부의 과도한 중소기업 지원정책이 중견기업에는 도리어 ‘역차별’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중견기업이 생산액의 11% 담당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정부는 은행마다 ‘중기 의무대출 비율’을 할당하고, 각종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낀 중견기업은 A사처럼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고용유발 효과와 성장잠재력에서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을 앞서는 중견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국내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
3일 동아일보와 기업은행 경제연구소가 중견기업 현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중견기업(종업원 300∼999명, 3년 평균 매출액 1500억∼5000억 원)은 1749개로 5인 이상 전체 기업(55만320개)의 0.32%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전체 기업생산액의 11%(183조8000억 원), 조세납부액의 10.3%(3조5000억 원)를 차지했다.
이와 관련해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대기업의 고용규모는 1997년 117만 명에서 2007년 92만 명으로 21.4%가량 줄었으나, 중견기업의 고용규모는 같은 기간 116만 명에서 112만 명으로 3.4% 감소하는 데 그쳤다. 이는 대기업에 비해 중견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인력과 투자를 늘리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자산총액 70억 원이 넘는 중견기업의 매출액 총계는 2002년 132조7000억 원에서 지난해 286조2000억 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 중소기업으로 머무르기 위해 비정규직 양산
이처럼 중견기업은 국내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정부 지원은 미미한 편이다. 특히 기업규모 확장으로 중소기업의 범주를 넘어서자마자 조세특례제한법 등에 규정된 연구개발비 세액공제, 투자 세액공제, 시설투자 세액공제 등 20가지에 이르는 각종 정부 지원이 끊기거나 축소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일부 중견기업은 중기 지원 혜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용인원이 300명을 넘지 않도록 직원 수 증가를 최대한 억제하거나 비정규직을 양산하기도 한다. 실제로 필름 제조업체인 B사는 매출액이 매년 늘고 있지만 직원 수와 자본금을 각각 287명과 98억 원으로 수년째 유지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일감이 늘고 있지만 중소기업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해 정규직 고용인원을 계속 억제하고 있다”며 “도저히 현 인원으로 감당이 안 될 때는 비정규직을 쓴다”고 전했다. 정부의 융통성 없는 중기 지원책이 비정규직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률적인 중기 의무대출 비율을 조속히 완화하는 한편 중견기업이 기업규모를 마음껏 늘릴 수 있도록 지원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종욱 서울여대 교수(경제학)는 “중소기업에 대한 과도한 정부 지원을 해소하는 대신 중견기업에도 적정한 자금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