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가전제품 딜러들 사이에서 ‘아가예 리’로 통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수도인 테헤란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마슈하드와 에스파한, 타브리즈 등 이란 전역을 한달에 7000km를 누빈다.
서울과 부산을 무려 20차례 오가는 거리를 다니며 하는 일은 세탁기와 냉장고를 파는 것.
아가예 리는 승용차 뒷좌석에서도 새우잠을 잔다. 딜러들과 열심히 협상하려면 이동할 때라도 체력을 비축해 두기 위해서다.
이란어로 ‘미스터 리’라는 뜻의 아가예 리는 이상엽 대우일렉 테헤란지사장(45). 그는 본사에서 홀로 이란에 파견 나왔다. 현지 직원까지 합해도 지사 인원은 달랑 5명.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본사 파견 직원까지 합해서 20∼30명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이 지사장은 이를 불평할 여유마저 없다. 올해 4월 동료 2500여 명 중 1200여 명이 회사를 떠나며 당부한 말들이 이 지사장의 귓가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해 미안하다’ ‘먼 훗날 내 손자가 우리 회사를 할아버지가 다닌 회사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도록 회사를 잘 키워 달라’…. 이 지사장은 “경쟁사 직원을 이기려면 딜러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봐서 제품을 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그는 올해 목표 실적을 상반기에 일찌감치 달성했다.
지난달 27일 그가 서울 중구 저동 대우일렉 본사를 찾았다.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7일까지 열린 해외 지법인장 회의인 ‘2009 글로벌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해외 지법인장은 대개 해외 거점도시에서 회의했지만 이번에는 3년 만에 본사로 집결했다. 혹독한 구조조정 이후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다. 이 지사장이 입사했던 1993년 대우일렉은 ‘탱크주의’로 이름을 날리며 삼성전자 LG전자와 어깨를 겨뤘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대우그룹의 몰락과 함께 대우일렉은 1999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는 에어컨, 영상 등 4개 사업부를 매각하는 아픔을 겪었다.
본사는 규모가 작아졌지만 열정과 오기가 넘쳤다. 본사 복도에는 ‘으랏차차 다시 서는 대우일렉-고난을 극복하고 위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들’이라는 포스터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사무직 노조인 ‘직장발전협의회’가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노조는 과거에도 회사가 어려울 때 다른 회사 노조 사무실에 제품 소개서를 들고 직접 영업에 나서기도 했다. 이 지사장은 “이번 위기에도 임직원이 똘똘 뭉쳐 회사를 살려내자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노조가 큰 힘을 보태고 있다”고 말했다.
3일 대우일렉 14층에서 열린 해외 지법인장 회의. 이성 대우일렉 사장은 해외 지법인장과 본사 임원 등 70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상반기 매출 5060억 원에 영업이익 222억 원을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참석자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지난해 영업이익이 32억 원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적이 크게 좋아졌기 때문. 이 사장은 “직원들이 열심히 뛴 덕분”이라며 “올해 매출 1조2000억 원, 영입이익 400억 원이 목표”라고 선언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이 사장은 신흥시장을 돌면서 직접 영업에 나서겠다고 했다. 우선 이달 중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와 이란 테헤란, 9월 초 독일 베를린과 멕시코 멕시코시티 등지에서 현지 딜러들을 많게는 1000여 명 초대해 신제품 발표회를 열 계획이다. 전영석 대우일렉 냉장고사업부장(상무보)은 “경쟁사들은 총알 여러 방을 쏘고 그중 하나만 맞으면 될지 몰라도 우리 회사는 여력이 없어서 한 방에 명중해야 한다”며 “소비자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한 신제품을 내놓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멘스나 GE 등 세계 유수의 메이커에 납품하는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26일로 대우일렉은 워크아웃에 돌입한 지 꼭 10년이 된다. 4일 출국 길에 오른 이 지사장은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너무나도 크다”며 “회사를 떠난 동료들에게 최소한 미안하지 않으려면 죽을힘을 다해 회사를 다시 살려 내서 대우일렉이 세계적인 가전회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