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진입장벽 세워서야
같은 도전에 대한 영국 마구업자들의 응전은 사뭇 달랐다. “도로를 망친다” “말이 놀라 마차 운행이 위험하다”는 등 주장을 펴며 정부로 하여금 적기(赤旗)조례를 만들도록 했다. 자동차 앞에서 빨간 기를 든 사람이 말을 타거나 걸으면서 통행인에게 경고를 해야 한다는 법령. 자동차 1대에 3명의 운전자를 태울 것, 마차보다 빠르지 않도록 최고속도를 시속 6.4km로, 시가지에서는 3.2km로 할 것 등의 단서도 붙였다. 이 조례로 업체들의 수명이 좀 연장되긴 했지만 다 망했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형슈퍼마켓(SSM)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의 진입을 늦출 수는 있다. 그러나 막을 수는 없다. 또 상황 변화에 적응해 자기변신을 해야 생존 가능하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대형마트나 SSM이 기존 상인들에게 위협적인 것은 소비자에게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다양한 구색으로 제공하는 까닭이다. 소비자 후생이 높아지는 것이다. 유통서비스 혁신을 틀어막으면 손해는 소비자가 본다. 살기가 불편해지고, 길게는 그 지역 집값도 떨어진다.
20∼30년 전만 해도 여성은 동네 양품점에서 외출복을 장만했다. 양복, 구두는 양복점, 구둣방에서 맞췄다. 하지만 백화점 및 전문매장과의 경쟁에서 이들은 서서히 밀려났다. 지금도 드문드문 양품점 등이 남아 있기는 하다. 묻고 싶다. SSM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즘 양품점에서 옷을 사는가.
따지고 보면 슈퍼마켓은 20∼30년 전 동네 구멍가게를 퇴출시킨 장본인이다. ‘슈퍼’란 말도 ‘구멍가게에 비해 크다’는 이유로 당시 붙은 이름이다. 만약 그때 구멍가게들이 슈퍼마켓 출현에 집단반발했다면 슈퍼마켓은 어떤 주장을 폈을까.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 구멍가게나 재래시장 상인들이 모여 슈퍼마켓 퇴출을 요구한다면 뭐라고 대응할까.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SSM 사업조정 제도는 노골적인 진입장벽이다. 진입·퇴출 장벽을 낮춘다는 기존 정책원칙과 정반대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SSM 추가진출은 사실상 중단됐다. 나아가 SSM뿐 아니라 대형마트, 서점, 주유소로 사업조정신청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SSM 규제의 명분이 ‘서민생활 보호’다. 우습다. 같은 상품을 값싸게 공급하는 것이 어떻게 서민생활을 침해하는가.
“슈퍼마켓, 찾으면 살 길 있다”
선진국에도 대형점포 진입규제가 있다. 하지만 기존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개 소음 등 주거환경, 교통 영향, 주변 건물과의 조화 등 도시 미관 측면에서의 규제다. 규제의 초점이 기존 상인이 아니라 지역주민 보호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물론 기존 상인들의 줄도산을 방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자체에 맡기면 사업조정 같은 진입규제만 하게 된다. 중앙정부가 팔 걷고 나서서 기존 상인이 경쟁력을 키우도록 도와야 한다. 밝은 눈으로 살피면 경쟁력 확보를 이뤄낸 사례가 없지 않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는 제주도슈퍼마켓협동조합의 조병선 이사장은 말한다.
“대형마트나 SSM의 진출을 막는 것도 길어야 1∼2년이다. 중소상인들 스스로 미래를 위한 대책을 세우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살 수 있다. 찾으면 길이 있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