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에이전트가 클라이언트 앞에서 완성된 디자인을 프레젠테이션하는 자리. 발표자로서는 피가 마르는 순간이다.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디자인 에이전트들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경청한다. 그러나 너무 잘하려다 보니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모 주류회사를 위한 패키지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은 너무 작위적이어서 탈이 났다. 책상이 없는 발표장의 맨 앞줄에는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그 뒤로 나머지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발표자는 프로젝터 대신 바퀴가 달린 이동식 화이트보드에 프레젠테이션 보드를 얹어 놓고 발표를 시작했다. 아직 완성된 디자인은 보여주지 않았다. 미리 공개하면 사람들의 이목이 발표보다 디자인에 쏠리고, 그럴수록 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제작 의도 설명이 끝나자 이동식 화이트보드가 뒤로 돌려졌다. 거기에는 좀 더 멋진 제작 과정 설명도가 붙어 있고 청중 사이에서는 약간의 감탄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빔 프로젝터로 발표하면 풍부한 색감을 살릴 수 없어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 설명도 끝나자 발표자는 양손바닥을 쳐 신호를 보냈고 측면의 문이 열리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예쁜 보자기에 싼 물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발표자 앞을 지나쳐 사장에게 다가갔다. 물론 보자기 속은 완성된 패키지 디자인이다.
미소를 띤 미인이 곱게 싼 보자기를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광경을 모든 직원이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사장이라 해도 쑥스럽고 어색한 순간이다. 이럴 때 보통 사람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여인은 물건을 사장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보자기를 푼다. 사장은 연신 헛웃음을 터뜨린다. 마침내 디자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여인은 애교 띤 목소리로 “이게 완성된 디자인입니다. 마음에 드시나요?”라고 묻는다. 어색함 때문에 경황이 없는 사장은 헛기침을 하며 디자인을 이리저리 보지만 쉽게 디자인에 집중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일단 예뻐 보이기는 하니 판매의 관점에서 살펴보지도 못한 채 “멋지군!” 하며 옆에 앉은 부사장이나 전무의 의견을 묻는다.
대개의 임원은 사장이 좋다고 했으므로 섣불리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덩달아 “좋군요” 하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애써 좋은 점을 찾아 사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는 임원도 있다. 사장과 임원들의 반응이 이렇게 되면 직원들은 덩달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 프레젠테이션은 이렇게 얼렁뚱땅 끝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클라이언트로서는 궁금한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뒤늦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양자는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원인은 디자인회사의 진솔하지 못한 태도에도 있지만 클라이언트가 디자인회사에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주문하지 못한 탓이 더 크다.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최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가급적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작업과정에 개입하지 않아야 하지만, 애초에 자신들의 요구사항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스스로 요구사항을 구체화할 수 없다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라도 숨김없이 전달해 놓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자꾸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 디자인하는 쪽에서는 혼란스럽고 요구사항들이 서로 모순돼 보이기도 한다.
잘 모르는 분야인 디자인에 관해 구체적인 요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양자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구체적인 요구를 위해서는 클라이언트가 자신들의 상품이나 디자인 업무와 관련된 퍼포먼스 인덱스(Performance Index)를 개발해서 갖고 있는 것이 좋다. 국내의 경우 이런 디자인 퍼포먼스 인덱스를 개발해서 갖고 있는 곳이 드물다. 그러나 기업은 퍼포먼스 인덱스를 통해 디자인과 판매량, 브랜드 인지도 사이를 매개하는 측정 가능한 변인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고 자사와 경쟁사 디자인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할 수 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평가를 피드백 받을 수 있어 디자인력 향상을 위한 자료로 삼을 수 있다. 신상품의 출시 전 광고나 상품 디자인에 관한 사전 조사를 할 때도 퍼포먼스 인덱스는 도움이 된다.
퍼포먼스 인덱스를 개발하는 데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관점과 진지함 그리고 약간의 예산만 있으면 가능하다. 이것이 부담스러운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한국디자인진흥원 같은 곳에서 개발을 지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디자인 발전을 위해 매우 긴요한 일이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