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글로벌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던 금융위기 한복판에는 리먼 브러더스와 함께 미국 최대 보험사인 AIG가 있었다. 당시 AIG는 신용등급 하락과 유동성 부족으로 파산 직전의 풍전등화 상황이었다.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작년 9월 16일(현지 시간) AIG를 살리기 위해 850억 달러의 긴급 구제금융을 투입했다. 1년이 지난 9일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있는 AIG빌딩 1층에 있는 한 식당에서는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의 금호종금과 뉴욕에 본사를 둔 한인 부동산개발업체인 영우어소시에이츠가 이끄는 컨소시엄이 월가의 랜드마크 건물인 AIG빌딩 매입을 자축하는 만찬을 열었다.》
한국자본이 월스트리트의 고층건물을 처음으로 사들인 뒤 월가에 입성한 첫날이다. 금호종금 컨소시엄은 6월 17개국 30개 컨소시엄을 제치고 AIG의 본사빌딩 매각 입찰을 따낸 뒤 3일 1억5000만 달러(약 1845억 원)의 대금을 완납했다. 소유권을 넘겨받은 금호종금 컨소시엄은 이날 주요 인사를 초청해 ‘집들이’를 한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월가 건물주들의 모임인 ‘뉴욕다운타운협의회’의 엘리자베스 버거 회장, 미국의 거물급 부동산 개발업자로 세계무역센터(WTC) 재건사업을 벌이고 있는 래리 실버스타인 회장, AIG의 프레드릭 운첼 부동산관리담당 사장 등이 참석했다.
버거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한국의 월가 입성을 축하한다”며 “오늘은 로어 맨해튼 역사의 새로운 장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버스타인 회장은 축사에서 “1930년대에 지어진 이렇게 아름다운 빌딩을 한국업체가 매입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미국 부동산업계는 금호종금 컨소시엄의 AIG 빌딩 인수를 매우 성공적인 거래로 평가하고 있다. AIG 빌딩은 부동산 호황기에 8억∼10억 달러를 호가했고 감정평가 가격이 4억 달러로 평가된 점을 감안하면 1억5000만 달러의 인수 가격은 파격적인 수준이다.
영우어소시에이츠의 우영식 회장은 최근 실버스타인 회장이 “그 가격에 AIG 빌딩을 산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그 가격이라면 내가 샀어야 했다”고 말하며 부러워했다고 전했다. 컨소시엄이 이런 가격으로 AIG 빌딩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정부에 공적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본사 빌딩을 매각하기로 약속한 AIG가 시간에 쫓겨 거래를 성사시켜야 했기 때문.
금호종금의 대주주로 이번 컨소시엄에 참여한 우리프라이빗에퀴티의 이인영 사장은 “한국이 외환위기 당시 외국자본에 파이낸스센터와 같은 건물을 헐값에 팔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자본의 월가 입성이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이날 AIG의 운첼 사장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고 사진촬영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또 AIG와 미국 정부는 빌딩 매각을 결정하기 전 금호종금과 우리프라이빗에퀴티, 영우컨소시엄의 공신력과 자금관계 등을 철저히 뒷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컨소시엄은 AIG가 내년까지 이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AIG 측과 1달러의 임대차 계약을 했으며 이후에는 빌딩 고층 일부를 주거용 아파트나 콘도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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