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기업과 합작 성공
3저 호황 타고 초고속 성장
잇단 마찰에 결국 ‘결별’ 나서
우리와 기술 제휴를 한 회사는 외형상 세계에서 업계 1위인 기업이었다. 그래도 나는 합작이 내키지 않았다. 제품 생산 기술과 마케팅 전략만큼은 배우고 싶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이 많이 뒤졌고 마케팅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할 정도로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였다. 내가 제시한 네 가지 조건은 합작회사 쪽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였다. 합작이 이뤄진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유리했다. 나는 상대 회사가 싫다고 나가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의 연락이 왔다. 합작을 하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다시 미국 보스턴으로 큰아들을 만나러 갔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했는데도 저쪽에서는 합작을 하자고 한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첫 번째 상의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아들이 그간 생각을 했는지 대답을 내놨다. “하세요.” 두 회사는 1984년 11월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했고, 1985년 4월 당시 재무부에서 양사의 합작투자 계약에 대한 인가를 얻어 합작사인 애경산업주식회사 설립등기를 완료했다.
1986년 들어 유가 달러 금리 등 이른바 3저 호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의 국민총생산 성장률은 12.5%를 기록했다. 선진국 대부분이 2%대 성장률을 보이던 데 비하면 엄청난 고도성장이었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2%대로 안정됐고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48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뒤 1988년까지 3년 연속 흑자를 냈다.
고도성장의 기반 속에 애경산업은 출범 이후 전년 대비 매출총액이 1986년에는 110%, 1987년 67%, 1988년 52%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순항을 지속했다. 설립 자본금은 10억800만 원이었으나 1986년 10월까지 2차례 증자를 통해 자본금이 133억8200만 원으로 늘었다.
우리 쪽에 더 유리한 계약조건이었지만 나는 실제 경영 과정에서 가능한 일은 뭐든지 하도록 했다. 합작 상대 회사에서 나를 ‘예스 마담’으로 부를 정도였다. 1986년 7월에 섬유 린스 포미, 11월에 비놀리아를 내놨다. 세제 분야뿐 아니라 식품 분야로도 협력을 넓혀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립톤티를 내놓기도 했다.
합작사의 경영진이 바뀌고 때맞춰 국내 시장이 개방되기 시작하자 상대측은 기존의 조건에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먼저 제품에 이름 붙이는 방식이 쟁점이 됐다. 그들은 합작한 제품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신들의 상표를 붙이자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인 만큼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한국식 상표를 붙이자고 주장했다.
개발 구상에서 제품이 나올 때까지 1, 2년 동안 고생을 하고도 제품 이름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국식으로 할지, 아니면 서양식으로 할지 등 기본적인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생산과 판매에 지장을 주기 일쑤였다. 이름을 놓고 티격태격하는 중에 그들은 의도가 불분명한 해외출장을 가버려 신제품 출시가 한없이 지연됐다. 방해 아닌 방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나 저제나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 못해 내 서명만으로 추진하면 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합작이란 서로 합의해서 하는 것인데 마담 장이 혼자 마음대로 일을 추진했다. 이는 계약 위반이며 우리를 무시한 처사로, 전적으로 마담 장의 잘못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애경을 자신들의 자회사 비슷하게 만들려는 야심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더욱이 그들은 애경의 임원 및 기술자 몇몇과 밀회를 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은 세계 수준에서 많이 뒤떨어졌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애경 정도는 얼마든지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던 셈이다.
결국 나는 그들과의 결별을 결심하고 그들의 야심을 깨기 위한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생활용품 다국적 회사와의 싸움에서 애경은 사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합작과 관련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 집단이었다. 재판은 2년 가까이 진행됐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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