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0대 기업 중 한 곳인 A사의 최고경영자(CEO)는 2년 전 한 해외 투자설명회에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회사의 사업 계획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온 요구는 “사회적 책임(CSR) 보고서를 보자”는 것이었다.
기업의 환경적(Environment), 사회적(Social) 성과와 지배구조(Governance) 등 이른바 비재무적 분야에서의 활동과 정보를 담는 기업의 CSR 보고서 작성을 차일피일 미뤄 왔던 이 CEO는 귀국 즉시 CSR 발간에 착수했다고 한다.
‘돈에도 윤리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사회책임투자자(SRI)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ESG)’와 연계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결정한다.
107개 기업(코스피 106개, 코스닥 1개 종목)이 21일부터 파이낸셜타임스 스톡 익스체인지(FTSE) 선진지수에 편입됨에 따라 해외 투자자들의 한국 기업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를 통해 보니 비재무적 성과에 대한 기업들의 노력은 기대 이하인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 친환경 기본 정보, 공개조차 안 한 기업 많아
기업의 친환경 경영을 보여주는 보고서에는 통상 △친환경 비용 △온실가스 배출량 △대기 오염가스 방출량 △물 소비량 △물 방출량 △폐기물량 △폐기물 재활용률 등이 담긴다. 글로벌 선진 기업들은 이러한 지표들을 수치화해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내거나 기업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의 자료 공개율은 매우 낮았다. 특히 폐기물 재활용률에 대한 공개율은 평균 15.9%로 저조했다. 공개율이 가장 높은 친환경 비용도 26.2%의 기업만이 자료를 냈다. 기업별 업계별 투명한 비교 분석을 위해 필요한 항목별 ‘전체 규모 또는 총량’을 공개한 기업도 소수였다.
친환경 비용을 사전 투자비용과 사후 처리비용으로 나눠 보고하고, 두 가지 내용에 대한 세부지표를 비교적 성실히 보고한 기업은 한화석유화학, 포스코, 삼성SDI, 대우조선해양, 한국가스공사 등 5곳에 그쳤다. 온실가스 관련 자료를 공개한 기업은 107개 기업 중 28개였고 이 중에서도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보고한 기업은 13개에 불과했다.
기후변화 등에 따른 각종 리스크에 노출된 ‘고위험군’ 기업은 44곳으로 분석됐다. 반면 주로 해외 기업들로 구성된 FTSE 선진지수 100대 기업 중에서는 28곳만이 이에 해당됐다.
박주원 KOCSR 상무는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환경 분야에 있어서 한국 기업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투자를 유도하려면 더욱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관련 자료가 너무 취약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 사회 공헌과 기업 규모는 별개
KOCSR는 사회 공헌 금액도 조사했지만 최종 보고서에서는 뺐다. ‘사회 공헌’에 대한 정의가 기업마다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조사 대상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보고한 ESG 관련 보고서를 토대로 기업 규모와 비교해본 결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순이익 대비 사회 공헌 금액 현황’을 살펴보니 1위가 대구은행, 2위 금호산업, 3위 삼성전자, 4위 우리금융지주, 5위 아모레퍼시픽 순으로 나타났다. 즉 기업 규모와 사회 공헌도는 비례하지 않았다.
이번 분야별 분석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점은 ESG 분야를 아우르는 비재무 분야 활동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기업이 107개사 중 37개사에 그쳤으며 CSR 리포트 내용 역시 수박 겉핥기인 곳이 상당수였다. 일부 기업들은 사회공헌 금액 단위를 잘못 기재해 분석 조사 실무를 담당했던 KOCSR 직원이 일일이 해당 기업에 전화를 걸어 이를 확인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이사회 의장-CEO 분리된 기업 17곳뿐
영미식 지배구조가 최상인지는 논란▼
이사회 의장과 최고경영자(CEO)가 분리된 기업은 17곳에 불과했다. CEO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 여부는 국내외 사회책임 투자자와 유엔 산하 사회책임지수의 지배구조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항목이다. 10대 그룹 중 이사회 의장과 CEO가 분리된 계열사가 있는 곳은 LG그룹,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 3개뿐(2008년 기준)이었다.
사외이사의 독립성 문제도 제기됐다. 자료를 공개한 기업들이 발표한 이사회 내 사외이사의 비율은 평균 52.8%였으며 사외이사 중 비독립적 인사의 비율은 10.7%나 됐다. 비독립적인 사외이사를 유형별로 보면 전현직 회사 및 계열사 임직원이 36.5%(19명), 3% 이상 주주와의 연관자도 36.5%(19명)로 쌍벽을 이뤘다.
하지만 독립적인 이사회를 두고 이사회 의장을 CEO와 분리하는 영미식 기업지배구조가 최상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최근 한국 기업의 뛰어난 위기탈출 능력이 오너 경영에서 나오는 빠른 의사결정력과 업무추진력에 있다는 분석도 있어 ‘기업지배구조’ 분야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조사대상 107개 기업
▽제조업(63개)
△CJ △CJ 제일제당 △롯데칠성음료 △롯데제과 △농심 △하이트홀딩스 △KT&G △한화석유화학 △호남석유화학 △에쓰오일 △SK에너지 △SK △아모레퍼시픽 △태평양 △LG생활건강 △동부하이텍 △유한양행 △제일모직 △SKC △효성 △LG화학 △한화 △삼성정밀화학 △한국타이어 △현대하이스코 △현대제철 △풍산 △동국제강 △포스코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삼성테크윈 △현대오토넷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삼성전기 △삼성SDI △LG디스플레이 △LG전자 △LS주식회사 △신도리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현대모비스 △한라공조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대림산업 △대우건설 △GS건설 △현대산업개발 △현대건설 △KCC △삼성물산 △금호산업 △삼성 엔지니어링 △DC케미컬(현 OCI) △STX 조선
▽금융업(18개)
△신한금융지주 △국민은행 △대구은행 △하나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부산은행 △기업은행 △외환은행 △한국투자금융지주 △삼성카드 △대우증권 △삼성증권 △우리투자증권 △대신증권 △현대증권 △삼성화재해상보험 △동부화재 △미래에셋증권
▽기타서비스업(26개)
△NHN △다음커뮤니케이션 △엔씨소프트 △제일기획 △에스원 △웅진코웨이 △강원랜드 △LG데이콤 △LG텔레콤 △KTF △SK텔레콤 △KT △대우인터내셔널 △롯데미도파 △롯데쇼핑 △신세계 △현대백화점 △한진해운 △현대상선 △대한항공 △글로비스 △두산 △STX △SK네트웍스 △GS홀딩스 △LG
기업명은 2008년 말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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