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부터 나는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곧잘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초등학생 때는 노래 콩쿠르에 나가 독창부문에서 적잖게 입상하기도 했다. 안병원 선생님 지도로 활동한 ‘봉선화 동요회’ 영향도 컸다.
유학 초기 언어 문제와 장학금에 대한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에만 매달리던 나는 의사소통과 공부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자 합창단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인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래라는 장기를 활용하게 됐다. 음악은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즐기는 ‘만국 언어’이기에 한국에서의 노래 실력을 미국에서도 인정받았다.
2학년 때 오디션을 통과해 학교 합창단에 들어갔다. 2년에 한 번씩 발표회를 했는데 3학년이 되자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규모 있는 무대였다. 이 무대에서 나는 프리마돈나(오페라의 여주인공)인 나비부인(초초상) 역할을 맡았다. 푸치니 작품 대부분에서 여주인공의 비중이 크지만 나비부인에서 초초상 역할은 사실상 ‘독무대’라고 할 만큼 극중 비중이 높다.
내가 프리마돈나가 되자 학교뿐 아니라 필라델피아 지역 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국적인 동양인 마스크를 가진 한국 사람이 입단조차 하기 힘든 합창단의 오페라 공연에서 프리마돈나까지 맡은 일은 지금까지도 모교에서 화제가 된다.
합창단에서 나를 지도한 이탈리아인 선생님은 화학도인 나에게 오페라 유학을 권했다. “이탈리아에 가서 본격적으로 오페라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장학금을 받도록 내가 직접 추천장을 써 주겠습니다. 미스 장 실력이면 ‘나비부인’ 하나만 성공해도 평생이 보장될 것입니다.”
솔깃했다. 합창단 입단 뒤 오페라 공부를 1년간 했기 때문에 욕심도 났다. 하지만 나는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어렵게 시작한 화학 공부를 끝내고 싶었다. 그때 내가 제안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로 오페라 공부를 떠났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합창단 친구들과 함께 학교 근처 호텔에서 합창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돈을 벌었다.
룸메이트 가운데 나와 특히 친했던 필라델피아 상공회의소 회장의 딸이 있었다. 그 친구의 부모 앞으로 배달되는 초청장으로 나는 뉴욕 오페라, 카네기 홀, 메트로폴리탄 등 미국에서 손꼽히는 홀에서 개최되는 음악회를 1등석에 앉아 자주 관람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나의 감각은 그때 많이 향상된 듯하다. 지금도 나는 음악회나 발레 감상을 좋아한다. 숫자와 조직 속에서 경영자로 살다가 예술 공연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딴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이 들어 행복하다. 경영이라는 현실과 예술이라는 이상이 어떻게 보면 상반된 듯하지만 다른 세계를 경험하면 경영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내게 학문적 문화적으로 국제적인 안목을 키워준 유학은 이후 가정주부에서 애경이라는 그룹의 회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올 6월 나는 모교 총동창회에서 ‘2009년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졸업자상’을 받았다. 졸업한 지 꼭 50년 만이다. 총동창회는 “남성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 첫 여성”이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1985년 모교 개교기념 60주년을 맞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또다시 귀한 상을 받아 자랑스럽다.
궁핍한 현실의 돌파구로 택했던 유학이 훗날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다 같은 하나의 비탈길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오르막길이라고 생각하는 비탈길을 오르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면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내리막길이라고 보던 길을 뒤돌아보면 새로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역경과 고난이라고 생각되는 현재가 먼 훗날 뒤돌아보면 성공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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