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108>‘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10월 13일 02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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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유통업 진출 모색
애경 창업의 모태된 구로공장터
“아버지가 일군 땅” 장남에 맡겨
1993년 백화점 진출 밑거름으로

애경은 서울 구로, 경기 수원, 분당, 평택에서 4개의 AK플라자(옛 애경백화점)를 운영한다. 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세우면서 유통업에 진출한 뒤 지금은 백화점뿐 아니라 면세점, 온라인쇼핑몰로도 사업을 확대했다. 그런데 AK플라자의 법인명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다. 공식 문서에는 ‘애경유지공업㈜ AK플라자’라고 쓴다. 서비스를 판매하는 백화점의 법인명이 ‘…유지공업’이라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여기에는 애경의 역사가 녹아 있다.

구로역에 위치한 AK플라자 구로본점 자리는 애경을 창업한 남편이 타계하기 직전까지 비누와 세제 등을 만들던 애경유지 공장 자리다. 애경이 창업 이후 규모 있는 기업으로 자리를 잡는 동안 이 공장은 애경의 터전이었다. 남편의 사후 사원들이 성금을 모아 흉상을 만들어 세운 곳이기도 하다.

당시는 행정구역상 영등포구에 속해 임직원들은 이곳을 ‘영등포 공장’으로 불렀다. 그곳에서 1970년대까지 세제인 트리오를 생산하다가 시설 확충에 따라 대전으로 공장을 옮긴 이후 창고로만 써왔다. 공장을 옮기기 전까지 애경유지는 애경그룹의 모체로서 지금 분리된 계열사 일을 모두 조금씩 담고 있었다. 유지제품 제조 및 무역업, 화장품 제조, 부동산 임대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그룹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 생산량은 세제인 스파크, 트리오 등의 생필품이 35%, 석유화학제품이 65%를 차지했다.

계열사의 매출이 늘면서 전문성이 중요해졌고 이에 따라 1987년 애경유지의 기존 사업 분야를 계열사에 양도했다. 애경유지의 기존 생필품 분야는 애경산업(현 애경㈜)으로 전부 넘겼고, 나머지는 화학 계열사로 조금씩 넘겼다. 애경유지공업이라는 애경그룹의 대표 법인명은 백화점(AK플라자)에, 세제와 샴푸 화장품 등 애경그룹의 모태가 된 사업은 애경산업(애경㈜)으로 나눈 셈이다.

이에 따라 애경유지는 1987년 사업 분리 이후 애경백화점(현 AK플라자)이 탄생하기까지는 공장 터를 창고로 쓰며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것 이외에는 지주회사로 법인만 유지하는 상태였다. 나는 이 땅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구로 지역 상권은 성장세였고 인근 경기 지역의 수요를 흡수할 수 있어 이곳에서 새 사업을 벌이면 지리적으로도 유리하다고 봤다.

나는 장남인 당시 채형석 사장(현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에게 “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어떻게 활용할지 잘 연구해 보라”며 맡겼다. 이미 1985년부터 경영수업을 시켜오고 있던 터라 역량과 경험을 쌓게 하자는 목적도 있었고, 특히 장차 애경그룹을 이끌 리더로서의 능력이 있는지 알아볼 요량이었다.

채 사장은 보스턴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1985년 애경산업 생산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입사 직후 5개월간 공장에서 생산현장을 몸에 익히게 했다. 제조업체 사장으로서 ‘생산의 중추’인 공장을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1986년 여름까지 8개월간 애경산업 영업부에서 영업 경험을 쌓게 했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년 6개월은 애경산업 마케팅부에서 마케팅 감각을 갖추도록 했다.

채 사장은 1986년에 애경유지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사원에서 사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인데 회장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일하는 모습을 보니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애경유지 대표를 큰아들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은 ‘무주공산’에서 완전히 신천지를 개척하도록 한 의미도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이름뿐인 기업이었지만 아버지가 직접 만들고 일군 기업을 장남이 물려받도록 한 뜻도 있었다. 아버지가 만들었으나 지금은 깨끗이 비워진 그 땅에서 아들이 가업(家業)의 새로운 장(章)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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