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한테서 “아껴 쓰고 저축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어요. 그런데 요즘 신문 기사를 보면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해서 경제가 어렵다”는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도대체 저축이 좋은 건가요, 소비가 좋은 건가요?》 저축 안해도… 소비 안해도… 둘다 문제 적절한 소비심리 유지돼야 경제에 활력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군요. 사실 이것은 경제 기자들도 자주 헷갈릴 정도로 매우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왜냐고요? 우선 이 문제엔 ‘정답’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문제의 정답은 때에 따라 다릅니다. 저축이 중요할 때도 있고 소비가 미덕일 때도 있다는 뜻이에요. 또 이 질문엔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수많은 경제이론, 또 지난 1년간 세계경제가 거쳐 온 모습들이 한꺼번에 압축돼 있습니다. 자, 그럼 풀이를 시작해 봅시다. 일단 사람들이 저축만 하고 소비를 안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죠. 사람들이 돈을 안 쓰면 기업들이 생산한 물건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겠지만 결국에는 부도가 나겠죠. 실직자들도 쏟아질 겁니다. 사람들이 직장에서 해고되면 소득이 줄어드니 소비가 더 위축됩니다.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가정에서 소비만 하고 저축은 하나도 안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마어마한 부잣집이 아닌 다음에야 모두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라앉겠죠. 가정경제가 파탄 날 겁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가계는 그렇다 쳐도 기업은 물건이 잘 팔리니까 결국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을까요”라고 할지 모릅니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계 빚이 계속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 씀씀이를 줄일 것이고 결국 기업들의 생산과 고용이 위축되겠죠. 온 나라 경제가 타격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소비 버블의 붕괴라고도 합니다. 물론 이 얘기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모든 가정이 소비만 하거나 또는 반대로 저축만 하는 상황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죠. 하지만 비슷한 일들은 실제로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를 들어볼까요.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는 미국 등 선진국 국민들의 지나친 소비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찾아온 저금리 호황기를 맞아 이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돈을 썼죠. 물론 늘어난 소비만큼 자산 가격과 소득이 계속 올라줬다면 큰 문제가 없었겠죠. 하지만 거품은 결국 꺼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분에 넘치는 지출을 마다하지 않던 그때는 분명 소비보다는 저축이 더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본격화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난해 가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기업들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투자한 주식이나 부동산 값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죠. 경제가 언제 회복될지 모른다는 공포심리가 사람들을 짓눌렀습니다. 그러면서 소비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자기가 회사에서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고 또 집값이 얼마나 더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함부로 쓰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소비를 줄이다 보니까 위에서 설명한 대로 경기 침체의 골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저축이 미덕인 시대에서 일정 수준의 소비가 필요한 시대로 다시 바뀐 것입니다. 결국 경제가 충격 없이 잘 굴러가려면 경기 상황에 따라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적절히 유지돼야 하는데 이를 조절하는 것은 정부의 몫입니다. 정부는 소비가 과열되면 금리를 올려서 저축을 유도하고 반대로 소비가 지나치게 부진하다 싶으면 사람들이 돈을 더 쓸 수 있도록 세금을 깎아주거나 보조금을 줍니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 정부가 올 초부터 가장 열심히 했던 일도 이처럼 소비 진작을 위해 각종 부양책을 쓰는 것이었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한국 경제는 어떤 상황일까요. 아직 경제가 완전히 살아나지 않았으므로 소비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과 이미 경기부양책으로 소비심리가 매우 빨리 회복돼 다시 저축을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습니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앞으로도 정부는 계속 세금을 깎아줘야 할까요? 아니면 한국은행이 조만간 금리를 올려야 할까요? 독자 여러분도 지금부터 경제지표들을 펼쳐놓고 각자 한 번 판단해 보세요. 제가 서두에 이 문제가 참 어렵다고 한 이유를 곧 알게 될 겁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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