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960년대부터 수출 위주의 성장 전략에 따라 제조업에 비해 유통업의 발달이 더뎠고 제조업자가 유통까지 관여하는 유통 계열화가 보편화됐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 말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본격화하면서 유통 시장 역시 개방 압력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8년 도소매업의 경쟁과 균형을 도모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목표 아래 5개년 계획을 통한 개방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1989년 제1차 유통시장 개방 계획을 세운 데 이어 1991년 2단계, 1993년 3단계 개방계획이 착착 실현됐다.
이런 가운데 큰아들인 채형석 애경유지 사장(현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을 필두로 옛 영등포공장 용지의 활용 방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수도권 규제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면서 검토 과정에서는 용지 매각 방안도 나왔으나 애경그룹의 창업 터전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신규 사업 진출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당시 구로 지역에는 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추진됐고 온수와 오류 시흥에서는 재개발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서울 서남부 인구 밀집 지역 한가운데 위치한 3만5438m²(약 1만720평)의 땅에 뭘 해야 할지, 1988년 한국과 일본의 전문 연구기관에 각각 리서치를 의뢰했다. 국내외 현황에 대해 1년간의 연구를 거쳐 나온 결론은 두 기관 모두 유통업으로 일치했다. 1980년대 들어 서울과 지방 대도시에만 있던 백화점이 다(多)점포 정책을 펼치면서 지방 중소도시로 점포를 늘리기 시작했고 대기업이 유통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0년 전국에 19개밖에 없던 백화점이 1985년에는 32개, 1990년에는 46개, 1992년에는 68개로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로역과 가까운 애경유지 공장 터는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니 쇼핑센터가 좋겠다는 게 두 기관이 공통으로 내놓은 연구용역 결과였다. 구로지역은 서울 서남부지역과 수도권 위성도시를 연결하는 연계 교통망이 형성돼 서울 도심으로의 구매인구 유출은 별로 없고 수도권 위성도시의 수요는 흡수할 수 있는 서남부 핵심 상권이었다.
‘굴뚝 마인드’에 30년 넘게 익숙한 애경그룹이 ‘서비스 마인드’를 이해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 임직원도 있었고, 화학 이외의 분야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을 가진 임직원도 있었다. 비누나 세제를 만들다 화학 분야로 진출할 때는 제조 공정상 기존·신규 사업의 연관성이 높았지만 백화점은 애경그룹이 최초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덩치를 불리기 시작한 경쟁 백화점의 공세에 버텨낼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나는 백화점도 애경의 주력 제품인 생활필수품을 포함해 물건을 파는 곳이니만큼 애경이 하는 전체적인 사업 흐름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애경그룹이 언제까지나 제조업에 머물러서는 발전이 없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나부터 철저히 준비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 시내 백화점을 돌아봤다. 해외에 출장을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짬을 내 출장지의 백화점을 들렀다. 일본 유럽 미국 등 해외 백화점을 둘러보기 위해 일부러 출장을 갔다.
백화점 디자인과 시설에도 파격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했다. 그동안 안전 위주로 사업을 벌여왔던 애경의 전통적인 경영 방식과는 달랐다. 인테리어 기획은 당시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뉴욕 HTI 스페이스 디자인 인터내셔널의 디자이너 햄프레 씨가 맡았다. 백화점 콘셉트 구성 작업에는 일본의 유명 백화점에서 경험 많은 기획 전문가가 참여했다.
애경백화점은 단순한 백화점을 넘어 고객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했다. 그래서 전체 백화점 용지를 3등분해 백화점 매장과 문화 공간(스포츠, 커뮤니티) 및 주차장으로 구성했다. 특히 주차장은 지하 5층까지 모두 1700여 대의 차량을 수용하도록 했다. 이렇게 설계가 끝나고 삽을 뜰 일만 남았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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