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짠 포트폴리오 토대로 투자
개인 역량 발휘는 20∼30%에 그쳐
새 종목 발굴에 하루하루 스트레스
직감보다는 통찰력-상상력이 생명
‘억대 연봉의 대명사, 분초를 다투는 두뇌 싸움, 하루에 수천억 원을 주무르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큰손….’
대학생들의 선호직업 1순위로 떠오른 펀드매니저에 대한 이미지다. 9월 말 현재 금융투자협회에 등록된 펀드매니저는 1087명. 펀드매니저 1000명 시대를 맞은 지금, 겉으로 비치는 이들의 이미지는 실제와 얼마나 부합할까.
동아일보는 68개 자산운용사에 설문을 의뢰해 답변을 보내온 684명의 정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이공계 전공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축, 수학, 산업공학 등 이공계 출신 펀드매니저들이 전체의 20.6%였다. 경영(35.7%) 경제(22.4%)의 비율이 단연 높았지만 수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하는 파생금융상품이 많이 나오면서 이공계 출신이 증가하는 추세. 처음부터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에서 경력을 쌓은 매니저가 대부분이지만 삼성전자, 한화, SK텔레텍처럼 해당 산업에서 변신한 이도 의외로 많았다.
자산운용업계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주식시장에는 화학 건축 나노기술 의료 등 모든 업종의 업체가 상장돼 있다”며 “직감에 따라 주식을 사고팔기보다는 해당 산업을 깊게 들여다보고 새로운 흐름을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이 펀드매니저로 적합하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자산운용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펀드매니저 39명은 증시가 마감하면 더러 이런 경고성 e메일을 받는다. 수익률이 기준지수를 밑돌 때나 너무 좋아질 때다. 이 회사 박진호 주식운용3본부장은 “매니저가 지나치게 변동성이 높은 종목을 편입한 것은 아닌지 점검하라는 경고신호”라며 “과거에 비해 펀드매니저 개개인의 재량권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이는 펀드매니저 1000명 시대의 한 단면이다. 드라마에 나오듯 하루에 수백억 원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매니저는 실제로 없고 개인의 역량은 집단 속에서만 발휘된다. 미래에셋도 구재상 대표 등 극소수 임원을 제외하면 대중적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매니저는 거의 없다. 약 10년 전 펀드투자 붐이 막 시작됐을 때 신문 광고에 팔짱을 낀 펀드매니저들의 사진이 큼직하게 실렸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펀드매니저들이 투자할 종목을 고를 때 세 단계를 거친다. 우선 회사 리서치파트에서 모델 포트폴리오를 짠다. 이를 토대로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함께 모여 전략 포트폴리오를 추리고, 최종적으로 실제 투자할 종목을 뽑는다. 회사가 짠 포트폴리오 하에서 펀드매니저 개인이 역량을 발휘하는 부분은 많아봤자 20∼30% 수준이다. 그나마 이런 ‘독자 플레이’를 할 땐 최고투자책임자(CIO)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한투운용 강신우 부사장은 “한두 명의 스타매니저에게 전권을 맡겼다 수익률이 크게 나빠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직하면 결국 투자자들만 손해”라며 “펀드매니저의 오판(誤判)을 막아내기엔 지금이 훨씬 더 좋은 구조”라고 말했다.
○ 더 심해진 경쟁, 통찰력과 부지런함이 살길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 한다는 부담은 줄었지만 다른 펀드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더 늘었다. 이른바 ‘손이 타지 않은’ 종목이 없기 때문이다. 신영투신운용 이상진 부사장은 “시장에서 웬만한 기업은 모조리 연구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새로운 종목을 발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경쟁은 ‘선수’끼리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매니저가 어떤 종목을 사려고 보면 이미 투자해 있던 ‘개미(개인투자자)’들이 털고 떠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차별화하려면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이채원 부사장은 “신종 인플루엔자가 확산되면 여행업, 백화점 등이 타격을 받으리라고는 누구나 다 생각한다”며 “여기서 한발 나아가 사람들이 손을 씻어 눈병이 줄어드는 바람에 안과마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추측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찰력은 부지런함에서 나온다. 한국밸류 매니저들은 일주일에 4번 이상, 연간 100∼200번은 투자회사를 직접 탐방한다. 이미 사들인 종목도 분기에 한 번 확인한다. 기업의 CEO와도 수시로 만난다. 이렇게 해서 얻은 ‘감(感)’은 통찰력이 되고 투자의 오류를 줄이게 된다.
ING자산운용 최홍 사장은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어 지금은 2만 원인 주가가 20만 원이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미포조선의 주가가 2000년에 4000원에 불과했지만 2007년 말 39만 원대로 무려 100배 가까이 치솟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투자한 기업에 대해 입김 커졌지만 최근 3년간 펀드매니저 절반 이직▼ ‘펀드 자본주의’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펀드매니저의 역할이 커졌지만 빛과 그늘은 여전히 존재한다. 펀드매니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의 경영에 관여한다. 최근 효성이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하자 알리안츠자산운용은 항의서한을 보냈다. 경기에 큰 영향을 받는 반도체 산업을 운영해본 경험도 없이 해당 분야로 진출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미래에셋은 20% 가까이 들고 있던 효성 지분을 발표 이후 며칠 사이 5% 이하로 줄였다. 매년 정기주주총회 시즌이 되면 매니저들은 더 바빠진다. 기업들이 세운 경영목표, 선임하려는 감사나 이사 등이 기업의 경쟁력을 올릴 것인지를 판단해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부분 무조건 찬성했지만 최근에는 사안별로 반대표를 던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하지만 펀드매니저의 주주 대리인 역할에 순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기업들은 오늘내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할 때가 있다. 단기수익을 노리는 펀드는 이런 사안에 반대표를 던질 때가 많다. 펀드매니저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우려할 만하다. 국내 펀드 순자산 총액은 330조 원으로 매니저 1명이 평균 3039억 원을 운용하는 셈이다.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매니저들의 이직률은 높다. 올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매니저의 절반 정도가 회사를 옮겼다. 펀드당 3년에 두 차례 이상은 매니저가 교체됐다. 또 대형 운용사들은 신입사원을 뽑아 키우지만 작은 운용사들은 인재 빼앗아오기로 명맥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끼리 얼굴을 붉히는 것도 다반사다. 한 자산운용사의 임원급 매니저는 “업계에서 5년 이상 같은 펀드를 운용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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