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베네통 ‘충격’이 말하는건 ‘너·나·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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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31일 03시 00분


인종갈등 - 문맹 - 에이즈 등
도발적인 리얼리즘 광고로 ‘필 통하는 기업’ 이미지 심어


어떤 디자이너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디자인 리더십과 소비자 욕구 가운데 무엇을 중시할 것인가의 문제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한 회사가 유명 모델을 골라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것으로 파악된 제품의 장점, 경쟁자와의 차별 포인트를 반영한 광고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는 소비자의 욕구에 충실한 광고 디자인이다. 소비자 욕구에 기반한 디자인은 실패할 확률이 낮고 통합된 기업이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장에서 디자인 리더십을 갖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면 마케터보다 디자이너의 의사결정권이 더 커서 독창성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하게 되면 디자인 리더십을 갖게 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해도 아이디어들 간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한마디로 말해 독창성 위주 디자인만으로는 장기적으로 기업 전체의 통합된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기 어렵고 판매에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경쟁사를 도와주는 광고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균형이다. 소비자 욕구나 독창성 중 어느 한쪽만을 중시하는 방식으로는 디자인이 강한 기업이 되기 힘들다. 그래서 기업들은 소비자의 요구를 중심에 두되 독창적 디자인을 가미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물론 말이 쉽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모범적인 사례로 꼽을 만한 곳이 애플, 3M, 필립스, 소니, 다이슨 등이다. 이 기업들은 소비자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찾아내 제품이나 서비스 개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런 디자인 개발 방식 때문인지 이들 기업의 신제품에는 브랜드 확장의 사례가 많다.

독창적인 광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기업이 베네통이다. 1980, 90년대에 에이즈에 걸린 환자나 탯줄을 달고 있는 신생아의 모습 등 쇼킹한 사진을 사용한 대담한 광고 디자인이 브랜드와 제품 이미지로 이어져 강한 디자인 리더십을 구축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독창적이고 대담한 디자인 전략을 배우려 했다. 그러나 베네통의 디자인 전략을 독창성만 강조한 광고의 사례로만 본다면 크게 잘못 이해한 것이다.

베네통은 패브리카라는 인하우스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중심으로 광고 전략을 만든다.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은 전 지구적 어젠다, 예컨대 인종갈등, 문맹, 에이즈, 야생동물 보호 같은 이슈를 이용한 광고다. 알다시피 베네통의 광고에는 제품 소개가 거의 없다. 대신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는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는 광고를 하고 있다. 공익광고로 오인할 수도 있는 이런 광고를 제안하는 배경에는 베네통이 중상위 소득계층을 목표시장으로 삼으면서도 상대적으로 후발업체라는 사정이 있다. 젊고 진보적인 중상류 계층의 두드러진 행동 특성의 하나가 관심 분야가 넓고 전 지구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속 보이는 제품 소개보다는 그들의 관심사와 들어맞는 주제를 광고하는 우회로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베네통은 사회적 이슈를 광고에 담는 우회적인 전략을 통해 젊고 진보적인 소비자들에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일종의 동류의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소비자들과 이야기가 통하는 기업, 여타 ‘꼰대’ 기업과는 다른 ‘필이 통하는’ 기업 이미지를 심은 것이다.

전 지구적 이슈는 지역적, 종교적 장벽을 넘는 데에도 유리해 ‘유머’와 더불어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광고 소재다. 한편으로 이런 이슈들은 그동안 많은 매체에서 다뤄졌기 때문에 자칫하면 소비자들이 식상해할 수도 있다. 베네통의 해결책은 대담하고 노골적인 표현에 있었다. 직설적이고 순화되지 않은 리얼리티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오래된 이슈들을 새롭고 쇼킹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독창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베네통의 광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소비자 욕구와 특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독창성 혹은 창의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자동차와 같다. 잘 포장된 정확한 길을 달리지 않는다면 그 성능을 발휘하기는커녕 위험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그 길을 닦는 일차적인 책임은 클라이언트 측 브랜드 매니저에게 있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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