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위수 볼보그룹코리아 사장(59·사진)은 최근 새 경영 목표를 이렇게 세웠다. 경제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재고로 낭비되는 비용을 반드시 줄여야 한다는 절박감을 담았다. 석 사장은 이 표어를 다른 나라 지사에 해당국 언어로 번역해 보냈다.
‘재고는 죄고’라는 표어에 담긴 정신은 각국에서 이렇게 표현됐다. 볼보그룹의 미국 굴착기 공장은 ‘재고는 회사의 생명을 갉아먹는다(Excess inventory bleeds the life from a company)’, 독일공장은 ‘재고는 종말의 시작(Der Anfang vom Ende jeder Firma)’, 중국공장은 ‘재고는 재난(災難)’이라고 했다.
이는 석 사장이 제시한 경영혁신 목표가 세계 볼보그룹의 건설기계 생산현장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가 주도한 경남 창원공장의 경영혁신이 볼보그룹 건설기계 부문의 글로벌 표준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독일 공장을 뜯어내다
석 사장은 1998년부터 볼보건설기계의 창원공장에서 획기적인 혁신을 주도했다. ‘하나가 팔리면 하나를 만든다’는 의미의 동기화(同期化) 생산시스템을 성공적으로 도입해 주목받았다. 이때부터 볼보그룹에는 ‘창원식 시스템’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볼보그룹은 2003년 “전 세계 생산현장은 ‘창원’을 배우라”며 그를 굴착기 사업부문 글로벌 생산총괄로 선임했다. 국경을 넘어 ‘혁신의 달인’으로 인정받은 것.
그러나 독일 등 다른 해외 공장의 문턱은 높았다. 2004년 12월 볼보건설기계의 독일 굴착기 공장에선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당장 공장 설비를 뜯어내세요. 모두 바꿔야 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상태가 가장 좋아요.”
“독일 공장의 생산효율이 너무 떨어집니다. 창원공장이 10시간에 만들 것을 독일은 18시간이나 걸리잖아요.”
“설비를 바꾸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솔직히 말하세요. 한국이 독일을 따돌리고 생산물량을 빼앗아가려는 속셈 아닙니까?”
글로벌 생산총괄에 선임된 석 사장은 독일 공장의 설비를 모두 뜯어내고 재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콧대 높은 독일 기술자들은 그를 불신했다. 은근히 무시하는 눈치였다. 설득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독일 사람들은 상대 의견이 별로라고 생각하면 절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꾸준히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죠. 결국 공장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러자 생산 효율성이 40% 정도 좋아졌습니다. 이때부터 독일 공장은 입구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제가 독일을 떠난 지금도 태극기가 여전히 달려 있습니다. 공장장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혁신을 도와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이라고 하더군요.”
○ 창원에서 싹튼 성공
석 사장은 독일 미국 중국 공장의 혁신을 주도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경영성과를 인정받아 이달 1일 볼보그룹코리아의 첫 한국인 최고경영자(CEO) 겸 볼보건설기계의 아시아지역 총괄사장으로 선임됐다.
석 사장이 말하는 창원식 경영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는 그의 장기인 생산혁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둘째는 빠른 의사결정. “시간이 걸리는 서양 방식과 달리 90점짜리 의사결정이라도 빨리 내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모자라는 10점을 수정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경영이 어려울 때는 ‘환율 때문’ ‘수요 감소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유를 콕 집어 직원들에게 알려줬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불필요한 책임감을 느끼고 자격지심에 빠져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석 사장은 “회사 안팎에서 ‘창원식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지키는 정도(正道) 경영을 했을 뿐이고 이는 창원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하는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석위수 볼보그룹코리아 사장은… 1950년 경북 성주 출생 성주중, 성주 농업고, 고려대 기계공학과 1976년 삼성중공업 입사 1998년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생산담당 이사 1999년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창원공장장 2003년 볼보건설기계 굴착기 사업부문 글로벌 생산총괄 부사장
◇볼보그룹코리아는… 스웨덴에 본사를 둔 볼보그룹의 한국지사로 볼보건설기계, 볼보트럭 등을 산하에 두고 있다. 볼보그룹은 1998년 삼성중공업의 건설기계 사업과 창원공장을 인수하며 한국에 진출했다. 볼보그룹의 글로벌 매출은 작년 기준 약 50조 원이며 굴착기 덤프트럭 등 건설기계 분야에서 미국 캐터필러, 일본 고마쓰에 이어 세계 3위다. 볼보자동차는 2000년 미국 포드에 팔아 지금은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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