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디자인에 스토리를 입히면…깊은 울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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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1일 03시 00분


삼성전자의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을 위한 이브 베하의 작품(왼쪽)과 로스 러브그로브가 물의 흐름을 형상화해 디자인한 생수병. 사진 제공 지상현 교수
삼성전자의 발광다이오드(LED) 패널을 위한 이브 베하의 작품(왼쪽)과 로스 러브그로브가 물의 흐름을 형상화해 디자인한 생수병. 사진 제공 지상현 교수
많은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담보하기 위해 저마다 고유의 방법들을 개발해 이용한다. 예컨대 이브 베하라는 스위스 디자이너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디자인을 한다. 특정한 스토리를 설정하고 그 스토리를 시각적 상징으로 표현한다는 기분으로 디자인을 하는 것. 이렇게 디자인된 제품은 풍부한 스토리를 연상토록 해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구조나 운동방식을 모티브로 하는 디자이너도 있다. 사진에서 보는 물병은 로스 러브그로브라는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생수병이다. 물의 흐름의 시각적 특성을 페트병으로 재현한 것이다. 러브그로브는 이 밖에도 동물 관절의 유연함과 견고함에 착안해 이를 응용한 의자 등의 가구를 디자인하고 있다. 러브그로브는 스스로를 ‘캡틴 오가닉’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유기체의 모양과 운동방식에서 디자인의 모티브를 따오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그런 디자이너들을 여럿 보았다. 1980년대 필자의 선배 한 명은 옛 일본의 전위적인 패션 잡지에 실린 사진이나 그래픽 엘리먼트들을 모티브로 삼아 팬시상품을 디자인해 당시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히트 제조기로 불렸다. 필자 역시 비디오패키지 디자인을 위한 모티브로 백화점 디스플레이 디자인을 참고했었다. 물론 나만의 비밀이었지만.

그 선배나 필자의 경우 나름의 모티브의 샘을 발견한 셈이지만 그 샘이 베하나 러브그로브의 것처럼 장기적이고 안정적이며 모든 디자인 대상에 범용되는 모티브를 공급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것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이 땅의 다른 디자이너들에게서도 그런 모티브의 샘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경우는 많지 않다. 물론 모티브의 샘을 갖고 있어야만 좋은 디자이너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디자인 방법론을 익혀 사용하고 있다면 그 역시 나무랄 데 없는 창조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디자인 방법론은 일본이나 유럽이라면 모를까, 한국에서는 거의 연구되고 있지 않은 분야다.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순발력과 임기응변 능력만으로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늘 지울 수 없다. 기초가 부족한 운동선수는 슬럼프가 잦고 길다고 한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기초가 튼튼해야 지속적으로 독창적인 디자인, 시간이 갈수록 농익은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다. 그런 기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만의 모티브의 샘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러브그로브나 베하와 같은 우수한 샘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필자나 선배가 왜 그렇게 금세 마르는 샘밖에 파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 같다. 바로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위한 디자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하는 어릴 적 집에 깔려 있던 터키산 양탄자의 그림 속 스토리를 예로 들며 스토리가 얼마나 우리의 감성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 환경이 그런 스토리로 가득 찬다면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 것인가를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디자인이 그런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나오고 그의 시나리오 기반 디자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러브그로브는 유기체의 구조와 운동방식이 가진 기능성과 효율성에 열광한다. 그의 유기적 디자인은 직선으로 가득한 부자연한 환경의 경직성을 융통성이 큰 유기체의 구조를 통해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아쉽게도 그런 기본적인 문제에 천착해 본 적도 없이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뎠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필자의 무식 탓이지만 “디자인은 감각”이라며 생각하기를 멈추게 한 디자인계의 풍토도 꽤 영향을 끼쳤다고 항변하고 싶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기업에서 디자이너를 뽑는 사람이라면 변별력 약한 포트폴리오나 예측력도 없는 학점은 보지 않겠다. 차라리 디자이너에게 “당신만의 디자인 스타일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그 스타일의 배경은 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겠다. 그래서 그가 이 질문에 어떤 수준에서 답을 하는지를 보고, 그만의 모티브의 샘을 개발할 가능성은 있는지를 가늠해 보고 싶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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