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현 교수의 디자인 읽기]외국인도 척보면 안다, 키 쓰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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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8일 03시 00분


디자인에서 용도-기능 알 수 있을 때, 최고의 디자인

필자의 은사 한 분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인 키를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칭송한다. 키를 처음 보는 외국인들조차 정확히 잡고 자연스럽게 위아래로 흔들 정도로 형태 자체의 ‘어포던스(affordance·행동유도성)’가 높기 때문이다. 디자인계에서는 물건 스스로가 용도나 작동법을 알려줄 때 어포던스가 높다고 한다. 반대로 여는 방향을 알기 어려운 문이 있다고 하자. 이는 어포던스가 낮은 경우다.

어포던스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우리의 행동방식과 맞아떨어지는 사물을 보면 직관적으로 용도나 작동방식을 알 수 있다. 어포던스가 높은 물건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하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에 의해 다듬어져 스스로 사용법을 어포드하는 농익은 디자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키가 바로 그런 물건의 하나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다듬어져 스스로 사용법을 알려주는 좋은 디자인이 많이 있다. 예컨대 접이식 부채를 보자. 이 간편한 부채는 다양한 사용법을 제공한다. 접혀 있을 때에는 손바닥을 두드리거나 부채를 펴는 속도를 달리해 다양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중국무술에서는 공격무기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부챗살이 한데 접혀 있으니 살이 꺾이는 일도 거의 없다. 이 모든 장점은 구조가 단순하고 행동양식과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주판도 매우 훌륭한 디자인이다. 복잡한 계산을 보조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지만 구조는 극도로 단순하다. 그 단순성은 사용법을 제공할 뿐 아니라 아름다움까지도 만들어낸다. 수직 막대에 꿰인 주판알의 2 대 5 혹은 1 대 4의 상하 비례나 직선과 둥근 알이 만들어내는 형태 대비도 일품이다. 이런 점들 때문인지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두 물품이 우수 디자인 사례로 소장되어 있다. 아쉬운 점은 중국과 일본의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키도 조만간 그곳에 소장될 것을 기대해본다.

야구공도 100여 년에 걸쳐 많은 사람에 의해 다듬어져 오늘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책에 기록된 것만 봐도 다섯 차례에 걸친 큰 변화를 겪었다. 생각해보면 중학교 시절 필자가 야구에 매료되었던 것은 게임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학교 앞 운동구점에 전시된 가죽공의 아름다움에 반한 탓도 있었다. 당시 우리들이 ‘홍키 공’이라고 불렀던 흰 가죽으로 된 야구공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격이 비싸 가져보지는 못했지만.

현재 사용하는 야구공은 몇 차례의 변신을 거쳐 1915년경 벤저민 시브와 앨프리드 리치가 만들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야구공을 실밥 없이 만들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 실밥이 있어야 더 정확한 구 형태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현재의 모양이다. 가죽의 인장력을 고려할 때 현재의 곡선적인 실밥선은 최적의 단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절묘한 기하학이 아닐 수 없다. 이 실밥선은 공을 던질 때 공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역할도 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실밥에 손가락을 얹어 공을 던진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탄생하는 어포던스가 높은 디자인도 있지만 담백하고 세심한 마음에 의해 단번에 높은 어포던스에 이른 디자인도 적지 않다. 월터 헌트가 디자인한 옷핀, 기데온 순드베크가 디자인한 지퍼 등은 모두 당시의 환경에 최적화된 용품들로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모두 주변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형태를 과장하지 않는 소박한 마음에서 탄생했다.

이런 디자인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기능이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기능주의 미학을 이야기하면 조금 고답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기능주의 미학은 그리 단순한 미학이 아니다. 그저 기능적이면 아름답다는 식의 단선적인 뜻이 아닌, 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식물의 성장 패턴에서 모티브를 따오는 현대의 디자이너가 많다. 기능주의와는 거리가 먼 발상법으로 생각되지만 식물의 성장 패턴은 최고의 기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유기체의 성장전략을 보여준다. 기능주의 미학은 광대한 바다와 같다. 그 안에는 다양한 하위 미학이 존재한다. 아무리 자유분방하고 전위적인 디자인시대라 해도 기능주의 미학은 여전한 디자인적 창조력의 원천이다.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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