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리포트]명품의 대명사 ‘뱅앤올룹슨’ 덴마크 본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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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5일 03시 00분


최고의 상상력을 원하는가?
사외 디자이너에게 맡겨라
“디자이너, 직원으로 고용말라
관료화 되는 순간 창조는 없다”

덴마크 명품가전업체 뱅앤올룹슨의 수석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루이스 씨. 엄밀히 따지면 이 회사 직원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조직에 속해 있으면 관료화돼 창의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게 뱅앤올룹슨의 판단이다. 사진 제공 뱅앤올룹슨
덴마크 명품가전업체 뱅앤올룹슨의 수석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루이스 씨. 엄밀히 따지면 이 회사 직원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조직에 속해 있으면 관료화돼 창의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게 뱅앤올룹슨의 판단이다. 사진 제공 뱅앤올룹슨
레코드판을 정성스레 닦아 축음기에 올려놓는다. 그 위에 바늘을 살짝 얹으면 빙그르르 돌아가는 레코드판. 서서히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옛 축음기의 추억에 빠져들게 하는 오디오가 있다. 덴마크 명품(名品) 가전업체 뱅앤올룹슨의 간판제품으로 꼽히는 ‘베오사운드 9000’(CD플레이어)이다. 이 제품은 여느 CD플레이어와 달리 세로로 길게 서 있다. 앞면이 투명해 음악이 흐르면 CD가 뱅뱅 도는 게 보인다. 오디오박스 안에는 CD 6개가 한 줄로 나란히 배열돼 있고 어느 CD가 재생되는지 눈으로 볼 수 있다. 음악은 귀로 들어야 한다는 상식을 깨고 눈으로도 감상할 수 있게 한 것. 베오사운드 9000은 뱅앤올룹슨의 스피커까지 함께 사면 웬만한 자동차 값과 맞먹는 2000만 원을 호가한다. 그런데도 1996년 처음 판매된 뒤 14년째 여전히 인기다. 전자제품의 교체 주기가 통상 5년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수명이 꽤나 길다.

뱅앤올룹슨은 올해로 84년 된 ‘강소(强小)기업’이다. 1925년 라디오 엔지니어였던 페테르 뱅과 스벤 올룹슨이 의기투합해 회사를 세웠다. 연 매출은 2008년을 기준으로 27억9000만 크로네(약 6542억 원). 대기업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레고, 로열코펜하겐과 함께 덴마크의 3대 기업으로 꼽힌다. 한국에는 1998년 진출해 지난해 171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3년 전인 2005년(82억 원)과 비교하면 두 배로 성장했다. 뱅앤올룹슨은 삼성전자나 LG전자보다는 덩치가 작지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뱅앤올룹슨 제품만 고집하는 충성도 높은 고객을 거느리고 있다. 뱅앤올룹슨이 한국의 전자업체가 눈여겨볼 만한 ‘경영 비법’을 덴마크 스트루어 본사에서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뱅앤올룹슨의 CD플레이어인 ‘베오사운드9000’. 음악이 흘러나오면 CD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게 훤히 보인다. 사진 제공 뱅앤올룹슨
뱅앤올룹슨의 CD플레이어인 ‘베오사운드9000’. 음악이 흘러나오면 CD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게 훤히 보인다. 사진 제공 뱅앤올룹슨
○ 관료화 없애기 위해 사내 디자이너 없애

뱅앤올룹슨의 경쟁력은 디자인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회사에는 디자이너가 없다. 그 대신 회사 바깥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고용한다. 핵심 역량을 외부에 맡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페테르 페테르센 뱅앤올룹슨 혁신 담당 전무는 “디자이너가 직원으로 고용돼 있으면 관료화될 수 있다”며 “디자이너는 상상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스’가 있는 분위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베오사운드 9000을 비롯해 뱅앤올룹슨의 간판 제품들은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루이스 씨(70)의 손을 거쳤다. 루이스 씨는 뱅앤올룹슨의 수석디자이너라는 직함을 갖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직원은 아니다. 그는 덴마크 수도인 코펜하겐에서 자신만의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최고경영자(CEO)다. 1965년부터 뱅앤올룹슨 제품 디자인을 맡아 온 그는 영국 왕실의 공식 산업디자이너이자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박물관(MOMA)에도 제품을 전시한 거물이다. ‘천재 디자이너’ 한 명이 회사 하나를 40여 년간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다.

품질 깐깐하게 따져… TV, 1000번 떨어뜨려 안전테스트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은 ‘아이디어 랜드’로 불리는 뱅앤올룹슨 본사 회의실에 일주일에 한 번꼴로 와서 직원들과 회의를 한다. 이 회의에서 디자이너들은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 주도권을 쥐고 있다. 제품 개발이나 생산을 맡은 직원들은 디자이너가 고안해 낸 콘셉트를 현실화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페테르센 전무는 “디자이너가 무조건 옳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고 말했다. 일부 직원 사이에서는 ‘데이비드 루이스는 고약한 사람’이라는 농담 섞인 원성이 나올 정도다.

○ 조직의 일상 아닌 자신만의 일상에서 디자인 영감 찾아

뱅앤올룹슨과 계약을 한 디자이너들은 ‘조직의 일상’에 얽매이지 않은 대신 ‘그들만의 일상’에서 떠오른 영감(靈感)을 제품에 불어넣는다.

풍뎅이를 보고 풍뎅이 날개가 펼쳐지는 것처럼 CD플레이어의 뚜껑이 열리게 하거나(베오센터2) 갤러리에서 벽에 걸기 전에 잠시 바닥에 세워 둔 그림 액자를 보고 비슷한 모습의 TV(베오비전9)를 디자인하는 식이다.

겉모양뿐 아니라 제품이 작동하는 방식에도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담았다. TV를 켤 때 그래픽으로 처리된 검은색 커튼이 걷히면서 TV 화면이 보이도록 만든 베오비전9은 마치 20세기 초반의 극장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CD를 얹는 패널도 앞으로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원을 그리며 조심스레 앞으로 나오게 한다.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요리 접시를 정성스레 내미는 느낌이 든다.

뱅앤올룹슨의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앤더스 헤르만센 씨는 “여행과 작품 감상 등 일상적인 경험이 디자인의 원천”이라며 “일상에서 친숙한 디자인은 소비자의 공감을 얻기 쉽고 보편적이어서 제품 수명도 길어지게 한다”고 말했다. 특히 덴마크는 겨울이 춥고 길어서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오래 봐도 질리지 않게 디자인한다는 설명이다.
뱅앤올룹슨의 수석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루이스 씨가 자신이 디자인한 CD플레이어인 ‘베오사운드 9000’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제공 뱅앤올룹슨
뱅앤올룹슨의 수석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루이스 씨가 자신이 디자인한 CD플레이어인 ‘베오사운드 9000’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제공 뱅앤올룹슨

○ 음질 다스리는 톤 마이스터

오디오로 출발한 뱅앤올룹슨의 또 다른 경쟁력은 음질이다. 원뿔 모양의 스피커인 ‘베오랩5’를 보면 이 회사의 독특한 음질 철학을 알 수 있다. 이 스피커는 작동 전에 밑 부분에서 작은 마이크가 나오며 “둥∼ 둥∼” 하는 소리를 낸다. 스피커는 마이크를 통해 주파수를 측정해 실내의 소파나 가구, 사람의 위치를 스스로 알아낸다. 물체에 반사되는 소리까지 감안해 어떤 지점에서도 최상의 음질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스피커는 음향이 가장 잘 들리는 지점인 ‘스위트 스폿’에 사람이 있다는 가정 아래 만들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선 소비자가 꼭 그 지점에 앉는다는 보장이 없다. 베오랩5는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최상의 음질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된 제품이다. 다른 스피커도 공간의 크기, 사물, 사람의 위치를 자각해 음향을 보정한다. 또 음향을 위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분산시켜 바닥과 천장에 반사돼 왜곡되는 것을 최소화했다.

뱅앤올룹슨은 이런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톤 마이스터’라는 직책을 뒀다. 톤 마이스터는 물리학 음향학 전자공학에 능통한 전문가로 일반 엔지니어가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소리까지 짚어낸다. 뱅앤올룹슨의 톤 마이스터인 제프 마틴 씨는 “뱅앤올룹슨만의 고유한 기술은 사람들이 어느 장소에 있더라도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 ‘이동의 자유’를 줬다”고 말했다.

○ 무릎 높이에서 1000번 떨어뜨려도 끄떡없게

공장에서도 이런 장인정신은 살아있다. 제품 공정의 100%가 덴마크에서 이뤄지고 이 중 80%는 수작업을 한다. 제품에 쓰이는 특수 알루미늄은 볼보의 콘셉트카에도 쓰일 정도로 제조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

품질도 깐깐하게 따진다. 품질검사실 이름이 ‘고문실(Torture Chamber)’일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주부들이 집안에서 제품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해 리모컨에 바셀린과 로션 등을 바른 뒤 3000번 눌러본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TV는 60cm 높이에서 1000번 떨어뜨린다.

흡연 고객을 감안해 담배 연기를 내는 기계에 제품을 넣어서 변색 여부를 테스트한다. 하루 15개비 피우는 사람이 10년간 제품을 쓸 때를 기준으로 실험을 해서 색깔이 누렇게 바뀌는지 살펴보는 것. 적도 부근에서도 뱅앤올룹슨 제품을 즐길 수 있도록 사흘간 섭씨 40도의 오븐에 굽기도 한다.

피아 헤데가르드 뱅앤올룹슨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는 “전 세계 어느 장소에서, 어떤 소비자가 사용하더라도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모든 제품을 극한에 가까운 상태에서 실험해 본다”고 말했다.

뱅앤올룹슨은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함께 음질을 특화한 휴대전화 ‘세린’(2005년)과 ‘세레나타’(2007년)를 개발했지만 이 사업은 지난해 접었다. 잘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 대신 자동차 오디오 사업을 꺼내 들었다. 현재 최고급 자동차인 벤츠와 아우디에 오디오 시스템을 납품하고 있다.

칼레 흐비트 닐센 뱅앤올룹슨 최고경영자(CEO)는 “자동차는 현대인이 자기만의 공간에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얼마 안 되는 공간이라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자동차 음향 사업을 통해 뱅앤올룹슨이 100년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스트루어(덴마크)=김유영 기자 abc@donga.com

::뱅앤올룹슨은 어떤 회사
덴마크의 세계적인 명품 가전업체. 1925년 덴마크의 전기공학교에서 만난 페테르 뱅과 스벤 올룹슨이 함께 세웠다. 라디오를 시작으로 지금은 오디오, TV, 전화기, 스피커, 차량용 음향시스템 등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각국에 1140여 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1998년 진출했다. 지난해 매출은 27억9000만 크로네(약 6542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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