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 프린세스(milky princess·우유처럼 뽀얀 공주)’란 말을 들었을 때, 그 어감이 너무 예뻐 ‘야아’란 감탄이 나왔습니다. 밀키 프린세스는 무엇일까요. 씹는 맛이 쫄깃하다는 일본의 쌀 이름입니다. 세 끼 대하는 일상의 식사에도 심미안을 접목하는 일본 특유의 국민성을 느낍니다. 일본에는 밀키 프린세스 말고도 ‘아야 히메(비단 공주)’란 쌀도 있습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들이 쓴 ‘10년 불황 그러나 히트는 있다’란 책은 이들 쌀의 탄생 배경을 소개합니다. 2001년 일본 농림수산성은 산하 연구기관을 통합해 농업기술연구기구를 만들고 “연구자인 동시에 마음은 세일즈맨으로!”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푸드 스쿨 학생들 의견까지 모아 농산물 신품종 이름 후보를 만든답니다. 단순히 예쁜 이름 대회가 아니라 얼마나 비즈니스 마인드를 담았느냐를 판단해 이름을 짓습니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 롯데마트에서 잘 팔리는 국내 ‘브랜드 쌀’ 상위 5위를 살펴봤습니다. 임금님표 이천쌀, 철원 오대미, 추청 경기미, 함열 청결미, 참빛고운쌀입니다. 경남 울산의 참빛고운쌀을 제외하면 대개는 무미건조한 어감입니다. 정의석 롯데마트 곡물 바이어는 “지역 농협들이 각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쌀 포장비 일부를 지원받고 소비자들도 고향의 쌀 맛을 선호하기 때문에 국내 쌀 이름은 주로 지역과 품종을 표시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세련된 맛이 없기는 쌀 이름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민승규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내 농협과 민간의 종합미곡처리장이란 말이 늘 마음에 걸려요. 처리장이란 말은 주로 핵폐기물, 하수, 쓰레기 등에 쓰이잖아요.”
한국판 ‘밀키 프린세스’는 정녕 없을까 찾아 헤매다 전북 군산 회현농협의 ‘여보 사랑해’ 쌀을 발견했습니다. 아, 고루한 ‘정부미’ 냄새를 떨쳐낸 통렬함이라니…. 회현농협이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해 4kg 용량으로 만든 이 제품의 분홍색 포장지엔 하트도 그려져 있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노부부들도 손을 꼭 붙잡고 사간답니다.
농업 개혁, 농협 개혁이 어디 쌀 이름뿐이겠습니까. 쌀 소비 감소와 쌀값 하락으로 시름 깊은 농민들은 “불황이라 비싼 브랜드 쌀은 안 팔린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요. 감성적인 소비자들은 조금 비싸더라도 어여쁜 이름의 쌀을 집어들지 모릅니다. 공주 같은 쌀밥, 사랑의 쌀밥을 꿈꾸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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