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전문가 민주주의 시대’다. 정치 외교 경제를 비롯한 거창한 주제 말고도 전문가의 의견은 우리 일상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 지식의 발전과 현대사회의 복잡성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20년 넘게 우리도 전문가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권위는 총구보다는 지식에서 나오며 지식 생산자인 전문가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거꾸로 전문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점검해볼 때다.
최근 한국행정연구원은 세종시 원안에 따라 9부 2처 2청이 이전할 경우 20년간 100조 원이 넘는 돈이 낭비된다고 밝혔다. 발표 직후 “행정도시 이전으로 얻어지는 균형발전의 효과는 무시했다”며 객관적인 근거를 결여한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발표된 보고서도 “장밋빛 전망만 늘어놓은 보고서”라는 지적을 받았다. 2004년 7월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신행정수도 건설의 파급효과가 178조6000억 원이라고 밝혔다.
세종시의 경제적 효과를 내다본 전문가들의 견해가 무려 278조 원이나 차이가 난다. 이쯤 되면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 일반인이 알아듣기 어려운 전문용어로 포장돼 있을 뿐, 전문가들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이 든다. “박사 학위나 전문가 자격증이 거짓말 면허나 다름없다”는 비난이 나올 만하다.
영리병원 허용을 두고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서 내놓은 보고서 역시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180도 다른 의견이어서 영리병원 허용 결정은 또다시 연기됐다.
조직의 압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수들도 특정 사안에 대해 진지한 연구 없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이해관계에 따라 발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이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기는커녕 전문가들이 오히려 혼란을 부채질한다.
아직 우리 사회에 전문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면 전문가의 발언에 책임을 묻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기자생활 20년을 뒤돌아보면 시간이 흐른 뒤 틀린 것으로 판정된 전문가의 주장이 꽤 많다. 하지만 훗날 자신의 견해가 왜 틀렸는지 글로 쓰거나 공개 발언을 한 전문가를 본 적이 없다.
언뜻 떠올려도 인천국제공항을 계획할 때 “인천공항은 안개가 많이 끼어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한 전문가들이 훗날 뭐라고 말했는지 들어본 기억이 없다. 금융실명제를 놓고 TV토론에 나와 “실명제가 도입되면 경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격렬하게 주장하던 그 전문가가 자신의 발언에 대한 해명도 없이 버젓이 다른 주제를 가지고 TV토론에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모습도 봤다.
인터넷 시대에는 큰돈 들이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중립적인 시민단체가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아 이런 사례를 수집하고 인터넷에 공개해 나간다면 몇 년이 안 돼 이 사이트는 ‘전문가들의 무덤’으로 소문이 날 것이다. 그만큼 전문가들도 자신의 발언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다만 서로 봐주기 의식이 강한 우리 사회에 이런 시민단체에 참여할 전문가가 몇 명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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