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위기가 몰아닥친 지난해 상반기, 고철을 녹여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던 주물업체 A사는 원가 상승과 납품단가 동결 사이에 짓눌려 부도가 났다. 경기불황으로 주문물량이 크게 줄어든 데다 원자재 가격 인상에도 불구하고 원청업체가 납품단가 인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국주물공업조합에 따르면 2008년 11월 kg당 360원이던 고철 가격은 지난해 2월 490원으로 크게 올랐다. A사 대표는 “고철은 주물 원료의 80%를 차지하는 주 재료여서 고철값이 오르면 당장 수익성이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대기업은 ‘조금만 더 버텨보라’며 단가를 끝까지 올려주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 자동차 중기 72% ‘수익률 5% 안 돼’
글로벌 경제위기로 원가절감이 최대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압력’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중소기업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서울대 연구팀이 중소기업 10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동차·전자산업 하도급 거래 실태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로 겪는 어려움 여부를 묻는 질문에 ‘다소 있다’는 응답이 44.7%에 이르렀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고 응답한 수치까지 포함하면 전체 조사대상 중소기업의 53.1%가 납품단가 인하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납품 계약을 할 때 대기업과 납품업체는 암묵적으로 협력업체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을 정하는데, 이것이 정기예금 금리수준인 연 5%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답한 업체가 조사 대상의 57.5%에 달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거의 매년 원청업체와 납품단가 협상을 벌이고 있다”며 “대기업이 전년도 실적자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단가 인하를 요구하면 이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영업이익률이 5% 미만인 중소기업은 자동차업종이 72.1%로 전자업종(38.7%)보다 훨씬 많았다. 한 자동차 전문가는 “국내 부품 협력업체 수가 1997년 3083개에서 2007년 4557개로 크게 늘어 경쟁이 심해진 이유도 있지만 현대차가 계열 부품업체를 육성하려는 전략도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 그룹계열사인 부품업체 11곳에 주문을 몰아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중소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가격을 더 낮출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사상 최대 성과급도 중기 부담으로
실제로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현대차 계열 11개 부품업체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999년 7.7%에서 지난해 상반기 9.3%로 1.6%포인트 향상됐다. 하지만 만도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가 아닌 부품업체 31개 사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4.6%에서 2.0%로 2.6%포인트나 떨어졌다.
부품업체들은 “국내 자동차업체들이 임금 인상, 원자재 가격 인상 등 각종 인상 요인을 협력업체에 떠넘겨 자신들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부품업체 관계자는 “지난달 현대차가 노사 협상에서 직원들에게 사상 최대의 성과급(1인당 1600만 원)을 주기로 한 것도 결국 협력업체들에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 측은 “글로벌 경제위기로 자동차 수요가 급감하는 가운데 원가절감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또 협력업체들의 부채비율이 높은 것은 모기업의 글로벌 전략에 맞춰 투자규모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라는 게 현대차 측의 주장이다.
현대차 측은 “현대차가 글로벌 생산규모를 늘리면서 협력업체들의 전체 매출액이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해외 판매 증가 및 글로벌 생산 능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선 부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수직계열화 추진이 시급하다는 것이 현대차 측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건전한 산업구조 정착을 위해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 문제에 대한 정부 대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기계산업팀장은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원가절감 명목으로 대기업들의 단가 후려치기가 더욱 심해진 측면이 있다”며 “정부가 이를 적극 감시하는 한편 우량 협력업체들을 선별 지원해서 대형화와 전문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