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 전시장 구석구석 돌며 경쟁사 제품에 강한 호기심 “일본 업체 겁 안나” 자신감 겨울올림픽 유치 가능성 묻자 “모두 힘합쳐 열심히 뛰어야”
1년 9개월 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사진)이 던진 화두는 ‘긴장’이었다. 이 전 회장은 9일(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CES 2010’ 전자박람회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사회 모든 분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기로 인한 어려움이 지나간 것처럼 보여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세계의 강자들과 벌이는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이 전 회장은 그동안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 등 한국 사회에 짧고 굵은 화두를 던져 왔다. ○ 스스로와 경쟁이 중요하다
이 전 회장은 CES 참가 소감을 묻자 “이 쇼는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서로 비교 분석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며 세세한 제품의 특징에 대해 직접 질문하고 챙겼다. 경쟁사 제품에 대한 강한 호기심도 드러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 전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초박형 발광다이오드(LED) TV를 보면서 “일본 기업이 곧 따라오겠지”라고 했고, 전시된 프린터를 보고는 “작고 가볍고 성능이 좋아야지 하나라도 빠지면 경쟁력이 삐끗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들에게는 “삼성전자가 일본의 큰 전자회사 10개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데 얼마나 부담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삼성전자에도 부담이고, 나 개인도 부담을 느끼며, 직원들도 부담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사 제품을 볼 때도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 전 회장은 중국의 가전업체 하이얼의 전시장을 둘러보고 난 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을 직접 불러 중국 기업에 대한 대응 방안을 묻기도 했다. 최 사장은 “계속해서 한 단계씩 앞서 나갈 계획”이라고 답했다.
소니의 3차원(3D) TV용 입체 안경을 써보더니 주머니에서 자신의 돋보기안경을 꺼내 최 사장에게 건네며 “이것과 비교해 보라”고 말했다. 안경은 일단 편해야 하는데 소니의 3D 입체 안경이 자신이 늘 착용하는 돋보기보다 어떤 점이 편하고 불편한지 살펴보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별로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 전 회장은 “기초에서, 디자인에서 우리가 (일본 기업을) 앞섰으니, 한번 앞선 것을 (일본 기업이) 뒤쫓아 오려면 참 힘들다”며 “겁은 나지 않지만 신경은 써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 10년 전의 삼성전자는 규모가 지금의 5분의 1에 불과한 구멍가게 수준의 회사였다고 덧붙였다. 이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로 지금 자만하면 10년 뒤 다시 그 수준으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으니 잘나갈수록 더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이 전 회장이 사회 모든 분야가 긴장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식의 마음가짐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될 때 비로소 한국 사회가 일류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는 “기업뿐 아니라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항상 국내에서의 자기 위치, 세계에서의 자기 위치를 쥐고 가야 앞으로 변화무쌍한 21세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올림픽 유치 행보는 조심스럽게
이 전 회장이 지난해 말 특별사면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 강원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와 관련된 역할론 때문이었다. 이 전 회장은 이런 사회적 여론을 의식한 듯 “저 개인도 그렇고 국민과 정부 모두 힘을 합쳐서 한쪽을 보고 열심히 뛰어야죠”라며 올림픽 유치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 전 회장이 미국을 찾은 이유도 CES 2010에 IOC 위원들을 초청해 삼성전자의 TV와 휴대전화를 이용한 ‘모바일TV’로 올림픽을 도울 수 있다는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전 회장은 실제로 “전현직 IOC 위원을 만났다”고 밝혔다.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이 전 회장은 “그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정말 모를 일입니다. 상상하기 힘들고…”라고 말했다. 자신감을 표현하는 대신 겸손한 어법을 택했다. 삼성이 올림픽의 최대 스폰서이기 때문에 이 전 회장이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게 삼성그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라스베이거스=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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