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관수동 하나미소금융재단 사무실에 중년 남성 10명이 들어섰다. 이들은 작년까지 종로3가에서 좌판을 벌였다가 서울시의 노점정비사업으로 일터를 잃은 노점상들. ‘무등록 저신용 자영업자라도 자활의 기회를 준다’는 얘기를 듣고 각자 노점용 손수레를 사는 데 필요한 280만 원을 낮은 이자로 빌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20분을 기다린 끝에 상담직원과 만났다. “신용불량자, 개인파산자 계시면 손들어 주세요. 신청자격이 없습니다.” 곧바로 3명이 탈락했다. 5명은 서류심사 결과 빚이 많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남은 사람은 2명. 신용등급을 조회하자 이들 역시 부적격자였다. 평소 신용카드 연체 기록 등이 없어 신용등급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소금융은 신용등급 7등급 이하만 지원할 수 있다. “280만 원이 없어서 왔는데 신용등급이 높다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자활의 꿈이 깨지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저소득층에 미소(美少)금융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미소금융재단이 지난해 12월 15일 ‘한국판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무보증 서민소액대출)’를 표방하며 출범한 뒤 한 달간 실제로 대출을 받은 사람은 전국에서 24명에 불과하다. 미소금융의 문을 두드린 1만3400여 명 중 0.2%에 해당한다. 나머지 99.8%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격이 안 된다며 퇴짜를 맞았다.
신용도가 낮은 저소득층이 주로 찾는 대형 대부업체의 신용대출 승인율(35∼40%)과 비교하면 미소금융의 대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쉽게 알 수 있다.
연 4.5% 이하의 저금리로 창업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미소금융재단을 찾았던 서민들이 허탈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정부와 재단 측은 “담보 없이 빌려주는 것인 만큼 연체율을 낮추려면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지만 저소득층의 재기를 돕겠다는 당초 정책의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바늘구멍보다 좁은 대출 기회
19일 금융위원회와 미소금융중앙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전국 21개 미소금융재단과 지점을 방문한 사람은 1만34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5300여 명은 1차 기초심사에서 신용불량 또는 개인파산 경력이 드러나 대출신청조차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대출신청서를 작성한 8100여 명 가운데 5660여 명은 신용등급과 재산보유현황 조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절차를 밟아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한 사람은 2440여 명이지만 15일 현재 실제 대출을 받은 이는 24명(총액 1억1800만 원)뿐이다.
이처럼 대출실적이 저조한 것은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이다. 미소금융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등급(신용 1∼6등급 및 신용불량자 제외), 채무비율(재산 대비 50% 미만), 자기자금 비율(대출금의 50% 이상) 등 넘어야 할 문턱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는 돈을 빌리는 데 성공한 24명의 면면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바늘구멍 미소금융, 자격기준 완화하고 지방 지점 확충해야”
신용등급이 그나마 높은 편인 7, 8등급이 18명으로 75%에 이른다. 9등급은 4명, 10등급은 2명에 불과하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본래 취지를 살렸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 깊어지는 정부의 고민
‘한국판 마이크로크레디트’의 공허한 실적이 드러나자 이 제도를 친(親)서민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금융당국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스스로 일어서려는 서민의 자활의지를 뒷받침하는 중도실용 서민정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서민에게 기대감만 심어준 전시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일각에선 기금이 고갈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연체율을 낮춰야 하는 재단 측의 고충도 무시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미소금융재단 관계자는 “1, 2개월 시행해 본 뒤 문제점을 분석해 고칠 것은 고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출실적만으로도 미소금융이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또 한 번 좌절을 안기는 결과가 된 만큼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모호한 신용등급 산정 기준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소금융재단은 한국신용평가정보 등 3개 신용평가회사의 신용등급을 인정하고 있지만 각각 기준과 가중치가 달라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수도권을 뺀 지방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8개의 지점밖에 없어 소도시나 농촌의 주민들은 그나마 상담조차 받기 힘들다는 점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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