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문가들은 올해 한국 경제가 극복해야 할 최대 과제로 ‘고용 없는 성장’을 꼽았다. 전문가 3명 중 2명은 올해 4%대의 경제성장을 예상하면서도 고용 부진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정부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일자리 창출’에 둘 것을 조언했다. 구체적인 일자리 창출 방법으로는 △노동유연성 확대 △중소기업을 일자리 허브(Hub)로 활용 △기업인들의 고용 확대 노력 등을 꼽았다.
동아일보가 신년기획 ‘2010년 G20에서 2020년 G10으로’ 시리즈를 마치며 11∼15일 기업, 금융회사, 학계, 관계 등의 경제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올해 한국 경제 전망과 과제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지난해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58명이 B학점을, 27명이 A학점을 줬다. 2008년 평가(C학점 45명, B학점 33명)와 비교하면 점수가 대체로 한 단계씩 높아졌다. 주요국 가운데 가장 빨리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해외의 시각도 이런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설문에는 기업과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 및 임원, 대학교수, 경제연구소와 경제단체 대표 및 임원, 경제부처 장차관 등이 참여했다. 한국 경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분석하기 위해 설문 대상자 100명 중 94명을 지난해와 동일인이거나 같은 조직에 근무하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 ‘극단적 비관’서 ‘비교적 낙관’으로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묻는 질문에 전문가 72명은 ‘4%대’라고 답했다. 5% 이상 고성장을 예상한 전문가도 12명이었다. 지난해 1월 설문에서 전문가 79명이 2% 미만의 저성장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비교하면 1년 사이 비관에서 낙관 쪽으로 급속히 무게중심을 옮긴 셈이다. 이는 최근 선진국 금융시장이 안정되면서 교역량이 증가하는 데다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오르면서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 확산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경기 전망이 긍정적으로 바뀜에 따라 향후 집값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바뀌었다. 지난해 초에는 응답자의 70% 정도가 집값 하락을 예상했지만 올해는 88%가 현 수준을 유지하거나 5% 이상∼10% 미만의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고 답했다.
경기회복 속도와 관련해서는 ‘회복세를 유지하겠지만 속도는 느려질 수 있다’고 답한 사람이 74명으로 가장 많았다. 경기가 급반등하는 V자형 회복보다는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U자형 회복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 경제가 성장하다가 다시 침체의 골짜기로 빠지는 ‘더블딥’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 사람은 1명도 없었다.
○ 일자리가 최대 관건
올해 한국 경제의 위기요인으로 63명의 전문가가 ‘고용 부진 지속’을 꼽았다. ‘가계 부문 부실 확대’(13명), ‘더블딥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침체’(10명) 등 나머지 위기요인을 선택한 전문가를 모두 합쳐도 37명에 불과할 정도로 고용 부진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올해 정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경제정책(2개씩 복수응답)에 대한 답도 ‘고용 없는 성장’ 해법에 맞춰졌다. 가장 많은 77명이 ‘일자리 창출’을 꼽았고, 두 번째로 많이 거론된 ‘녹색성장 등 신성장동력 육성’(33명) 역시 일자리와 관련돼 있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노동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25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중소기업을 일자리 허브로 활용(24명) △기업인들의 고용 확대 노력(19명) △서비스산업 진입규제 철폐(13명)의 순이었다. 지난해 초만 해도 재정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반면 올해는 파견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는 직종을 늘리거나 전체 고용의 90%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에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도록 지원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의견이 분산됐다.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경제5단체장은 18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동유연성이 중요하다”며 구체적으로 대체근로제와 파견근로제를 확산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 노사관계 선진화 추세에 기대감
전문가 58명은 일자리 창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민간 부문에서는 내년 상반기나 돼야 본격적으로 고용이 늘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기업환경 개선 대책을 내놓았지만 자동화가 진전된 탓에 대기업이 신규 인력을 대규모로 채용하기가 쉽지 않고, 청년 실업자가 중소기업을 외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경기 상승세가 좀 더 확연해져야 취업자가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올해 노사관계는 과거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39명)이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13명)보다 많았다. 지난해 말 현대자동차 노사가 15년 만에 분규 없이 임금협상 합의안을 도출하는 등 전반적으로 노사관계가 선진화됐고 이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본 것이다. 반면 전문가 10명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을 계기로 노사관계가 과거보다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가계 빚, 서민금융으로 풀어야
전문가들의 절반 이상은 올해 한국 경제의 위험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 가계 부문의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미소금융 등 서민금융을 활성화’하고 ‘신용회복 프로그램을 더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올해 금리 상승이 불가피한 만큼 기존 대출의 이자 부담이 급증하지 않도록 공적 금융지원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가계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 비율이 1.35로 다른 선진국보다 높아 부실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기업 구조조정은 ‘민간 주도로 부실기업에만 선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47명으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민간이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쥐되 부실이 잠재돼 있는 기업으로 대상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을 낸 사람도 35명이나 됐다. 과거 대우사태 등에 비해 구조조정에 따른 충격이 덜한 만큼 부실을 과감히 도려내 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 설문에 응해 주신 경제 전문가 (총 100명·분야별 가나다순) ▼
○대기업 CEO 및 임원(28명) 곽영균 KT&G 사장 구자영 SK에너지 사장 구학서 신세계 회장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 김동철 에쓰오일 수석부사장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김종갑 하이닉스반도체 사장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부회장 김홍창 CJ GLS 사장 남용 LG전자 부회장 민계식 현대중공업 부회장 박승하 현대제철 부회장 박지원 두산중공업 사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 서경석 GS 부회장 서영종 기아자동차 사장 서종욱 대우건설 사장 손용찬 현대상선 상무 신동빈 롯데 부회장 이명진 삼성전자 상무 이상철 통합LG텔레콤 부회장 이석채 KT 회장 정만원 SK텔레콤 사장 정석수 현대모비스 부회장 정재훈 KCC 전략기획 이사 정준양 포스코 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사장
○벤처기업 CEO 및 임원(5명) 김상헌 NHN 사장 김영익 한글과컴퓨터 사장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사장 변대규 휴맥스 사장 이재성 엔씨소프트 상무
○금융계 CEO 및 임원(30명) 강정원 국민은행장 김순환 동부화재 부회장 김정태 하나은행장 김지완 하나대투증권 사장 김진겸 SC제일은행 부행장 래리 클레인 외환은행장 민유성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 신동규 전국은행연합회장 신용길 교보생명 사장 신은철 대한생명 부회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유준열 동양종금증권 사장 윤용로 기업은행장 이백순 신한은행장 이상용 손해보험협회 회장 이수창 삼성생명 사장 이우철 생명보험협회 회장 이종휘 우리은행장 이철영 현대해상화재보험 사장 이춘국 신한카드 부사장 이휴원 신한금융투자 사장 임기영 대우증권 사장 정태영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최경수 현대증권 사장 최도석 삼성카드 부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부회장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 황건호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황성호 우리투자증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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