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시장 불안 영향, 안전한 엔화 매입세 탄탄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엔고 불러… 급락 가능성도
최근 일본의 경제상황이 나날이 악화되지만 일본 엔화의 가치는 오히려 오르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26일 일본에 대한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27일(한국 시간)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은 89엔대로 떨어져 엔화가치가 크게 올랐다. 엔화에 대한 원화 환율도 이날 오후 3시 현재 100엔당 1300.04원까지 치솟아 연중 최고점을 경신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통화가치는 떨어진다. 하지만 일본은 예외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 “달러-엔화 썩어도 준치”
우선 국제금융시장에서 엔이 가장 안전한 통화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투자가들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화되고 신흥국에 투자한 돈을 빼 안전자산인 달러나 엔으로 바꾼다. 시장이 불안할 때는 달러와 엔이 가장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썩어도 준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엔화 강세 현상은 2000년대 이후 급격히 진행된 ‘엔 캐리 트레이드’가 청산되면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이 높다. 일본 정부가 장기간 초저금리를 유지해오자 엔화를 빌려 해외의 주식 및 부동산이나 고금리 국가의 채권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가 활성화됐고 특히 2005∼2007년 엔화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2007년 말부터 미국의 ‘서브 프라임’ 문제가 본격화되고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엔화를 바꿔 세계 각국으로 이동했던 투자가들이 다시 이 자금을 빼 엔화로 바꾸면서 엔화 가치는 급등했다.
지난해 중반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엔화도 다시 약세로 돌아섰지만 최근 중국발 긴축, 유럽 재정 위기, 미국 금융규제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청산되고 있다.
정미영 삼성선물 리서치팀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엔 캐리 트레이드가 상당 부분 청산됐지만 여전히 청산될 양이 많이 남아 있어 당분간 엔화 강세의 주요인이 될 것”이라며 “최근 엔화 강세는 2005∼2007년 캐리 트레이드로 인한 지나친 엔화 약세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 재정적자 커지면 위험해질 수도
엔화가 강세를 띠면 일본 수출기업에는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부담이 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과 달리 엔고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는 26일 “즉각 엔화 강세 기조에 대처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당분간 엔화 강세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많다.
하지만 앞으로 일본 정부가 유례없는 양적 완화 정책을 펴면서 일본의 재정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엔화가치가 폭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머크 인베스트먼트의 악셀 머크 회장은 “일본 민주당 정부의 양적 완화 정책이 계속되면 엔화가치가 포물선 모양으로 탄도 비행하면서 급락할 수 있다”며 “엔화를 더는 경화(hard currency)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화는 국제금융시장에서 금 또는 각국의 통화로 언제나 바꿀 수 있어 환관리를 따로 할 필요가 없는 통화를 뜻한다.
그는 또 “일본이 국내에서 적자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규모가 제한적이며 앞으로 몇 년간 재원이 고갈될 수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엔화는 국가부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 :
국제금융시장에서 저금리 국가의 통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의 주식이나 부동산 등의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추구하는 거래를 뜻한다. 일본 엔화가 대표적 저금리 통화로 활용돼 왔으며 이 경우 ‘엔 캐리 트레이드’라고 불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미국의 초저금리 정책으로 달러화도 활용되고 있다. 이를 달러 캐리 트레이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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