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10년 전 일이 떠올랐다. 21세기의 첫 10년을 여는 2000년은 벤처붐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기억된다. 주가가 급등하는 이유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이 거의 불가능하던 때였다. 주가가 기업 내재가치보다 수십, 수백 배 폭등하는 인터넷기업, 닷컴기업이 속출했다. 그러나 비이성적 투기가 조장한 거품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 3월 2,900선 가까이 치솟던 주가는 2004년 8월 320선대로 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곤두박질친다.
벤처 버블이 꺼진 데는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경기 부진이 촉발한 신경제의 몰락이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벤처 몰락은 주가조작, 횡령, 분식회계 등 벤처기업인들의 부도덕성이 드러나면서 더욱 극적으로 전개됐다. 시작은 순수했을지 몰라도 ‘돈 냄새’를 맡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본업과 동떨어진 기업에 투자하는 유사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변질됐다. 이후 벤처 1세대 기업인들 중 상당수가 법정에 서면서 한국형 벤처의 롤 모델도 사라졌다.
그때의 상처는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고 우리 경제 활력을 갉아먹고 있다. 시중엔 여윳돈이 넘쳐나는데 벤처기업으로 투자자금이 모이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벤처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다. 검증되지 않은 새 비즈니스를 하는 벤처기업엔 투자자들의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벤처인 스스로가 이 신뢰를 저버리면서 시장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벤처의 몰락은 젊은이들의 도전적인 창업 마인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20, 30대 비중은 1998년 58%에서 2008년 12%로 뚝 떨어졌다.
최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세계 최대 이동통신 전시회인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 참석해 “무선인터넷 분야에서 제2의 벤처붐을 이끌겠다”고 역설했다. 10년 만에 ‘벤처 어게인(Venture Again)’을 선언한 셈이다. 사실 지난해 이후 벤처기업을 둘러싼 주변 여건은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벤처기업 수는 작년 11월 말 현재 1만9148개로 2008년 말보다 3747개 늘었다. 벤처기업 인증을 시작한 1998년 이후 가장 많이 증가한 것이라고 한다. 벤처투자조합 및 결성금액이 크게 늘고, 정부의 벤처 지원정책은 김대중 정부시절과 유사할 정도로 전폭적이다. 녹색기술 벤처육성, M&A를 통한 투자금 회수 기회 확대 등 현 정부의 벤처기업 육성대책은 과거의 시행착오를 제대로 짚었다는 평가가 많아 고무적이다.
벤처기업은 꿈(아이디어)을 먹고 산다고 했다.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산다사(多産多死)형이다. 이런 점에서 제도적, 정서적으로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한국의 기업 환경은 손볼 곳이 많다. 벤처인들도 신뢰 회복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1차 벤처 붐이 꺼진 원인으로 벤처인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은 만큼 제도적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벤처인 스스로가 도덕적 재무장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21세기 첫 10년의 출발은 벤처의 꿈과 좌절로 점철됐다. 그 다음 10년의 시작을 알리는 올해 다시 벤처가 중앙 무대에 진입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점점 활력을 잃어가는 우리 경제에 벤처가, 벤처기업인이 새로운 자극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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