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온라인게임의 모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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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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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접속 가상세계서 인생의 오묘한 명암 공유
일회성 오락 아닌 종합교양물

2008년 9월 필자는 기업체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미국 측 연구용역 파트너는 액센추어였고 프로젝트 팀장은 비비안 케이라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손자 셋을 둔 60대 후반의 백발 할머니였다.

처음 나의 팀장을 봤을 때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뉴욕 본사의 중역이라고 해도 한국에서 개발하는 첨단 인터넷 서비스의 미국 시장 진출 로드맵을 60대 할머니가 작성한단 말인가? 20~30명의 다국적 인력들이 머리를 맞대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회의하는 빡빡한 일정을 주재하면서?

첫날 함께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게임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내가 즐기는 게임 '길드워'를 열광적으로 칭찬하면서 자신은 '워크래프트'를 PC타이틀 버전부터 지금의 '워크래프트 3' 온라인 버전까지 11년 동안 했고 요즘은 '에이지 오브 코난'에서 길드 마스터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메모지에 자기 아바타의 아이디를 적어주면서 연락하라고 했다.

"정말 멋진 게임이에요. 접속해서 우리 길드에 가입하세요."

나의 모든 의구심은 이 한 마디에 날아가 버렸다. 할머니의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진정한 인간적 자질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늙었지만 일만 년 전의 고대 지구에 펼쳐진 하이보리아의 황야를 달리면서 전쟁의 피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세계에서 자신의 길드를 일굴 만큼 강인한 영혼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 두 달 동안 할머니는 항상 명랑하고 관대하며 빈틈없고 명민한 팀장이었다. 그녀는 '마스터'였던 것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온라인게임의 세계는 한 인간이 세상에 보여주는 가면(World Mask) 아래 숨겨놓았던 진정한 자기(True Self)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인간의 내면적 본질은 보통 잠재의식의 영역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허구의 스토리가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상황의 압력에 의해 가면이 부서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러한 진정한 자기의 체험은 사람들의 내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과 자존감을 남긴다.

흔히 온라인게임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다중접속온라인게임(MMORPG)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현실세계를 모사한 가상세계에 동시에 접속해서 자신의 아바타에 설정된 각기 다른 배역(Role)을 연기(playing)하는 게임이다.

아바타는 먹지 않아도 되고 늙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가상세계는 현실 세계의 진정한 고통을 은폐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바타는 적나라한 시뮬레이션으로 모사된 경제적, 정치적 변동을 겪어간다는 점에서 현실세계에 길들여진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가상세계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는 사회이다. 게임 콘텐츠에 대한 개발사의 업데이트가 있을 때마다 각종 무기 재료, 방어구 재료, 장신구 재료, 광석, 식자재, 의복자재, 건축자재 등의 시세가 춤을 춘다. 어떤 직능에 어떤 직업이 유리한가 하는 시장 환경이 변한다. 전쟁도 많고 사건도 많다. 최상의 전투력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시시때때로 변하며 사용자 조직 사이의 세력 판도도 급변한다.

이러한 경쟁과 불안정 때문에 MMORPG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은 매번, 매순간 새로운 생활과 만나게 된다. 또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개인들의 불균등 발전에서 인생의 오묘한 명암을 느끼게 된다. 한국의 사용자들은 환경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여 좋은 아이템과 강한 전투력,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을 '쩐다'고 표현하며 경쟁에서 도태되어 좌절과 궁핍을 맛보고 있는 사람을 '허접하다'고 표현한다.

가상 세계에 모사된 이 같은 개인의 실존은 우리의 현실을 반성하게 한다. 현재 가장 많은 국내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MMORPG인 '아이온'에는 사용자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느낀 많은 스토리들이 게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서민 살성'이란 만화이다. 전문 만화가가 아닌, '서울청년'이라는 아이디의 일반 사용자가 그린 이 만화는 지금까지 6번 연재되면서 39만 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아이온'에서 '서민'이라 함은 돈이 없어서 좋은 장비를 갖추지 못한 사용자들을 말한다. 검성, 살성, 궁성, 수호성, 치유성, 호법성, 정령성, 마도성이라는 8개의 직업이 있는 이 게임에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살성'은 장비 수준이 떨어질 경우 '파티'라 불리는 집단 플레이에 초대받기가 힘들다. 이 만화는 자학에 가까운 자기 비하를 통해 서민 살성인 주인공이 '아이온'이라는 가상 사회를 살아가면서 겪는 애환을 묘파하여 바흐친이 말하는 민중적 웃음의 카니벌리즘을 만들어낸다.

가상사회의 이 같은 서민 체험은 우리 시대의 서민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도달한다. 돈이 없다고 해서 모두 서민인 것이 아니다. 가상 사회에는 서민을 욕되게 하는 천민도 있고 난민도 있다. '서민 살성'의 주인공은 항상 돈 걱정에 시달리면서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한 신발을 사서 선물한다. 힘든 파티 플레이를 끝내고 수호성 친구와 소주를 나누다가 문득 자신의 어릴 적 꿈이 이 세상의 영웅이 되는 것이었음을 떠올리고 현실에 매몰된 자신을 반성한다.

이렇듯 어려운 현실을 살면서도 의리와 인정을 잊지 않고 인간적인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서민일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럴 내지 윤리감각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온라인 게임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온라인 게임은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형상을 통해 일상의 관습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우리를 일깨우고 진정한 자기를 깨닫게 한다.

삶이란 이글거리는 불길 같아서 개념적 언어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 복잡다단하고 부조리한 덩어리이다. 우리는 소설, 수필, 연극, 영화, 게임이 제시하는 형상적 언어를 통해서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으냐를 배우고 각자에게 적합한 도덕, 가치관, 태도, 스타일을 형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모럴 형성력을 갖는 문화적 기제, 우리 시대의 종합적 교양이다.

이인화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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