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충남 천안시 동면 리싸이텍코리아 야적장에 쌓여 있는 폐통신장비들을 이 회사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리싸이텍코리아는 폐가전제품 등을 수거해 잘게 부수는 중간처리업체다. 천안=장강명 기자
#1. 통신사에서 폐기한 통신장비 100여 t이 쌓여 있는 야적장 뒤로 집게발이 부서진 인쇄회로기판들을 들어올렸다. 미끄럼틀처럼 생긴 파쇄기로 들어간 기판들이 작은 조각들로 부서져 배출구로 뚝뚝 떨어졌다. 16일 충남 천안시 동면의 리싸이텍코리아 공장에서 1, 2차 파쇄를 거쳐 10∼15mm 크기로 잘게 부서진 기판들은 겉에 ‘750kg’이라고 적힌 거대한 마대에 담겼다. 이렇게 잘게 부서진 기판들의 가격은 kg당 500원이라고 했다.
“꽤 비싸다”라고 기자가 감탄하자 이 회사 박승춘 팀장은 다른 마대를 가리켰다. PC 기판에서 수작업으로 떼어낸 중앙처리장치(CPU) 칩만 가득 든 자루였다.
“CPU 칩들은 kg당 가격이 25만∼30만 원입니다. 안에 금이 많이 들어 있어서 값이 비싸요.”
#2. 충남 아산시 둔포면의 토리콤 공장에서는 전해액이 가득 든 금속 욕조와 같은 통을 쇠막대기들이 쉴 새 없이 젓고 있었다. 이 통의 한쪽 배출구에서는 눈이 녹아 미끄러지듯 반짝거리는 젖은 가루들이 뚝뚝 떨어졌다. 리싸이텍코리아 등으로부터 받은 폐기물에서 순도 99.995%의 은을 추출하는 과정이다.
리싸이텍코리아와 토리콤은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광산업(Urban Mining) 기업이다. 산업폐기물과 폐전자제품에 포함된 금속을 추출해 재활용하는 이 같은 도시광산 사업을 정부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희귀금속 자원을 확보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자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아직 재활용 업계에서는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반갑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하면 한국의 도시광산 산업은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도시광산 업체들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료인 폐기물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리싸이텍코리아의 경우 한 달에 처리할 수 있는 산업·가정폐기물의 양이 1500t이지만 실제로 처리하고 있는 양은 월평균 500t 수준이다. 토리콤도 스크랩(고철) 등에서 금 은 인듐 등을 뽑아내는 귀금속사업 부문 시설 조업률은 50% 수준이다. 원료 부족 탓이다. “폐기물 확보에 역량 다 쏟아붓는 게 현실”
특히 가치 있는 각종 금속 스크랩들은 중국으로 탈법적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도시광산업체 관계자들은 전했다. 관세 당국이 폐기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약점을 이용해 영세한 수거업체들이 중국의 수입업체와 담합을 벌이는 것이다. 장부에 현저히 낮은 가격을 기재하고 수출하면 중국 업체는 세금을 피할 수 있고, 한국 수거업체들은 제대로 시설을 갖추고 재활용을 하는 것보다 높은 이윤을 현금으로 얻을 수 있다. 사실상 국내의 ‘자원’을 해외로 유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부 금속 스크랩 수출에서 대(對)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구리 폐기물의 경우 2008년 전체 수출량의 92%인 17만6800여 t이 중국으로 수출됐다. 중국 당국이 스크랩 수입 물량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하면 국내 고철 가격이 갑자기 내려갈 정도다.
기본적으로 소비자들의 인식 부족으로 폐가전제품 수거가 잘 안되는 것도 큰 문제다. 이정주 리싸이텍코리아 대표이사는 “소비자들 처지에서는 소형 가전제품들을 재활용한다고 생길 게 없고 귀찮기만 하니 그냥 버리거나 방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기업체나 기관이 수거 캠페인 등을 벌이지만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이사는 “환경오염 방지 차원에서라도 새 휴대전화기를 사려면 쓰던 제품을 반납하도록 하는 의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시광산 사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부처 간 업무가 겹치고 지방자치단체 등 일선에서 폐기물을 자원으로 보는 인식이 아직 부족해 생기는 문제도 많다.
구자명 회장 주도 아래 도시광산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LS니꼬동제련의 경우 2007년부터 2000여억 원을 들여 충북 단양군에 대규모 도시광산 시설인 GRM 공장을 지으려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본격적인 사업 착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관련 업무가 지식경제부와 환경부에 걸쳐 있는 데다 새로운 업종이다 보니 관련 부처에서 뭔가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일일이 해외 사례를 찾아보고 법적 근거를 확인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여기에 일부 주민들은 GRM이 폐기물처리시설이라며 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주를 반대해 사업 추진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문철상 토리콤 상무는 “폐기물 확보 영업에 역량을 다 쏟고 있는 게 업계 현실”이라며 “안정적으로 원재료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니 기술 투자를 할 생각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업체들의 기술력도 정체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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