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국제공항으로 가는 티켓을 끊으면서 “가능하면 창가 쪽 자리를 달라”고 하자 항공사 직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항공기 탑승 시간이 임박하자 탑승구 근처에는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10여 명은 아시아나항공의 승무원들. 이들은 이날 오후 3시 10분 무안국제공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향하는 항공편으로 갈아타기 위해 무안으로 떠나던 참이었다. 따라서 순수한 승객은 30여 명에 불과했다.
무안국제공항은 한국의 재정투자 효율성이 왜 주요국 중 꼴찌 수준으로 전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공항 철도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나랏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전에 수요 예측을 제대로 하지 않고 정치적 논리와 지역 민원에 휘둘려 무분별하게 예산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조세연구원의 ‘정부 지출의 효율성 측정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2000년 이후 8년 동안 SOC에 130조 원이 넘는 돈을 썼지만 SOC 재정투자의 효율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동유럽 2개국을 빼고는 최하위로 조사됐다.
인적 끊긴 공항… 차량 뜸한 고속도… 줄줄 새는 돈 ■ 부실 SOC투자현장 가보니 적막한 무안공항- 탑승률 25% 적자행진… ‘민간기업의 짐’ 전락 천안~논산 고속도- 실제 교통량 예측의 절반… 혈세로 손실 메워
무안공항은 ‘무인공항’ 전남 무안군 망운면 무안국제공항 내부. 인천국제공항 부럽지 않은 최신식 시설을 갖췄지만 이용객이 없어 ‘무인공항’이라고까지 불린다. 무안국제공항은 운영 첫해인 2007년부터 적자를 내고 있고,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광주공항도 2008년부터 적자로 돌아섰다. 무안=박영철 기자
어설픈 SOC 투자는 국민의 혈세를 깎아먹는 차원을 넘어 SOC를 활용하는 기업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세계 각국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SOC 재정투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다.
○ JAL의 실패 답습한 무안국제공항
텅 빈 무안국제공항에서 오버랩되는 장면은 1월 19일 일본항공(JAL)의 파산에 따른 법정관리 신청이다. JAL의 파산에는 무리하면서도 효율성 낮은 일본 정부의 SOC 투자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출마 지역의 공항 건설을 공약했고, 공항이 들어선 뒤에는 JAL에 취항하라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99개 국내 취항 노선 중 흑자를 낸 곳은 단 2곳에 불과했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의 김포∼무안 노선 평균 탑승률은 25%로 항공사들이 적자를 면할 수 있는 최소 탑승률로 보는 70∼80%를 훨씬 밑돈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적자노선이니 취항할 수 없다’고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고만 밝혔다.
무안국제공항은 1997년부터 2007년까지 3056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매머드급 SOC 재정투자사업이다. 그러나 낮은 탑승률에서 보듯 투자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판명난 상태다. 특히 이 사업은 예비 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아 사전에 효율성을 점검하는 과정도 생략됐다.
‘무안국제공항의 저주’는 여러 방면으로 튀고 있다.
2007년 11월 무안공항이 문을 열자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광주공항은 탑승객을 빼앗겨 이듬해부터 매년 10억 원 이상의 적자로 돌아섰다. 11일 기자가 무안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손님이 곧바로 공항을 떠나 공항에 입점한 상점은 거의 비어 있었다. 공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택시와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도 없었다. 공항이 생기는 과정에서 기대됐던 지역경제 수익원 및 일자리 창출 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
김상도 국토해양부 항공정책과장은 “최대한 빨리 무안국제공항으로 광주공항의 국내선 기능을 통합시킨다는 방침이지만 지역 주민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공항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공항공사가 운영관리를 맡은 공항 14곳 중 김포, 김해, 제주공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 너무 잘 뚫려 세금 새나가는 고속도로
13일 오후 2시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안성분기점 부근은 주말 나들이 차량으로 심한 정체를 겪었다. 인근 망향휴게소에는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하지만 천안분기점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로 접어들자마자 차들이 시원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종착지인 논산까지 지체되거나 정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천안∼논산고속도로에 있는 탄천휴게소 역시 한산했다. 주차장은 3분의 1 정도 비어 있었고 매장에도 사람들이 뜸했다. 음식 매장 종업원에게 “원래 사람이 이렇게 없느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무슨 말이냐. 오늘은 ‘놀토’(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여서 오히려 사람이 많은 편이고, 평상시는 이 인원의 절반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도통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어 음식을 다 팔지 못할 때도 많다”고 덧붙였다.
천안∼논산고속도로의 한산한 교통량은 휴게소 매장 주인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부 재정도 축내고 있다.
정부는 민자(民資)사업으로 천안∼논산고속도로 사업을 추진하면서 교통량 예측을 2008년의 경우 하루 5만7809대로 했다. 하지만 그해 실제 교통량은 절반 수준인 3만2209대. 이에 따라 최소운영수입보장금(MRG)으로 민간 사업자에게 472억 원을 지급했다. 국민의 세금에서 그만큼 지출된 것이다.
지난해 정부가 천안∼논산고속도로, 인천공항고속도로 등 7개 SOC 사업에서 MRG로 지급한 액수는 3830억 원. 2008년(3621억 원)보다 209억 원 늘었다.
보이지 않게 길바닥에서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 사례도 많다. 전북 남원∼곡성의 도로연장 공사는 1126억 원을 투자해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실시하기로 돼 있다. 하지만 감사원 감사 결과 이 공사의 적정 공사기간은 4년인 것으로 드러났다. 예산만 제때 뒷받침된다면 4년 만에 끝낼 수 있는 공사를 8년이나 끄는 것이다.
남원∼곡성 도로연장 공사를 관리 감독하고 있는 익산지방국토관리청 관계자는 “현장 민원이 없고 예산이 매년 250억 원 정도 나온다면 4년 만에 공사를 끝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며 “공사를 시작한 첫해인 2005년에 5000만 원, 2006년에 101억 원, 2007년에 92억 원이 나왔다”고 말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2009년 9월 현재 익산 및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시행 중인 토목공사 151건의 적정 평균공사기간은 5년이지만 예산이 부족해 공사기간이 7년 3개월로 늘어났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역 민원과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예산 배분이 효율적으로 되지 않아 예산이 낭비되는 현상이 심각하다”며 “이런 관행을 지속했다가는 그렇잖아도 줄이기 힘든 재정적자 문제를 해소하기 어려워 내년부터는 완공 위주로 예산을 편성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천안·공주·논산=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무안=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철도 투자는 늘리고 도로-공항은 깎는다
■ 정부, 내년 예산부터 반영
복선 전철-광역철도 집중 확대
도로는 ‘3차로’ 위주로 효율화
工期단축 통해 예산누수 방지
주말에도 뻥 뚫린 도로 13일 오후 천안∼논산고속도로의 논산 방면 모습. 주말 오후지만 교통량이 많지 않아 차들이 시원스레 달리고 있다. 이렇게 교통량이 적어 정부는 민자사업자에게 손실 보전액으로 연간 400억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있다. 세금이 그만큼 새나가는 것이다. 공주=박형준 기자정부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낭비 지적이 끊이지 않는 도로와 공항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효율성이 높으면서 녹색성장 기조에 맞는 철도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또 SOC 관련 예산을 완공 사업 위주로 집중 배정해 지나치게 긴 공기(工期)로 예산이 낭비되는 소지를 줄여나갈 계획이다.
18일 기획재정부와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2011년 SOC 예산편성 작업에 착수한 정부는 도로와 공항에 대한 재정 투입을 올해와 비슷하게 하거나 소폭 줄이고, 철도 투자는 늘리기로 했다. 올해 도로와 공항에 배정된 예산은 각각 7조8065억 원, 656억 원이고 철도 예산은 4조672억 원이다. 철도는 복선 전철화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광역철도 건설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재정부 고위 당국자는 “도로망은 이미 전국적인 기반이 닦여 있어 새로운 도로 건설을 가급적 자제할 것”이라며 “반면 철도 기반시설, 4대강 관련 사업 등은 저탄소 녹색성장 기조에 맞춰 투자를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도로는 확장보다는 기존 도로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아직 국내에 본격 도입되지 않은 3차로 도로를 늘리기로 했다. 3차로 도로란 왕복 2차로에서 어느 한 방향 도로만 추가로 만든 것을 뜻한다. 3차로는 4차로 건설비용의 3분의 2 정도로 끝낼 수 있고 공사 기간도 단축된다. 국토부 관계자는 “올해 시범사업을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3차로 도로 건설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는 SOC 투자와 관련해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설계 변경이 잦아 사업의 완공시기가 늦어지고 그만큼 예산도 추가로 투입됐다. 전문가들은 1000억 원대 토목공사의 공사 기간을 1년 단축하면 약 10억 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용석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의 SOC 투자 규모는 주요국 가운데 비교적 큰 편이지만 효율성은 상당히 떨어지는 실정”이라며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철도 기반시설 등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려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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